Category Archives: 언어학

라텍 대활약

언어학 문서를 라텍으로 작성할 때 얻을 수 있는 편리한 점을 몇 가지만 나열해 보자.

  • 국제음성기호를 넣을 때 문자표를 따로 불러와서 원하는 기호를 일일이 찾고 복사한 다음 붙여 넣을 필요 없이, 본문을 입력하는 그대로 원하는 자리에 기호의 이름(\textesh, \textopeno 등)을 쓰면 된다.
  • 본문에 예문을 인용할 때 예문의 번호를 직접 입력하는 대신 각 예문에 자기가 붙인 라벨 이름을 쓰기 때문에, 중간에 다른 예문을 삽입해서 예문 번호가 바뀌더라도 본문에 인용된 번호를 일일이 찾아서 고칠 필요가 없다.
  • 수형도를 그릴 때 다른 워드 프로세서에서처럼 각 노드의 위치를 정하고 일일이 선을 긋지 않는다. [ [meidi].NP [ [needs].V [ [some].D [love].NP ].DP ].VP ].S 처럼 문장 성분의 구조를 대괄호로 묶어 주면 저절로 수형도가 된다.

자기가 키보드로 입력하는 내용과 나중에 출력물에 나타날 모습이 같지 않다는 데서 오는 낯섦만 극복하면 직관에 들어맞는 문서를 편리하게 만들 수 있다. 우리가 언어학 책이나 논문을 읽고 발표나 토론을 할 때 `11번 예문’처럼 예문의 번호를 직접 언급하기보다는 `상원의원 예문’, `froze 예문’처럼 각 예문의 특징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일이 더 많다. 중간에 다른 예문을 추가한다고 해서 우리가 예문을 기억하는 방식이 바뀌지도 않는다. 라텍에서 문서를 작성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번 학기에 듣는 언어학과 전공 수업에서 발표문을 만들 때에도 라텍의 언어학 패키지를 활용할 일이 많았다.

  1. tipa의 활약: [응용음성학] 북경어의 모음
    http://frozenfiremeidi.net/blog/wp-content/uploads/2009/10/mandarin-vowel.pdf
    국제음성기호로 제3성을 표시하는 것은 유니코드를 지원하는 입력기에서조차 쉽지 않다.
  2. qtree와 gb4e의 활약: [언어학연습 2] 한국어와 영어의 결과구 형성에 대한 제약
    http://frozenfiremeidi.net/blog/wp-content/uploads/2009/10/resultative.pdf
    발제하려고 읽은 논문부터 라텍으로 작성되어 있다. (( Jong-Bok Kim, “Constraints on the formation of Korean and English resultative constructions,” in PROCEEDINGS-NELS, vol. 29, 1999, 137–152. ))

quasi-언어학 스니커

스텐실을 곡면에 찍기는 쉽지가 않았지만 마침내 해냈다. 나무 그림은 청*고 치약을 참조했는데, 가지를 이렇게 배치한 데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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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이 물건이 어째서 quasi-언어학 아이템이 되나요?

대답: 신발을 신은 쪽에서 보면 각 가지 끝이 왼쪽부터 NP, V, NP에 대응하니까, SVO 어순에서 타동사 문장의 수형도가 되잖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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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 티셔츠: 언어학자 이도 선생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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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다리미를 사 버렸다. 지폐 그림은 열전사, 글씨는 스텐실로 찍었다.

이 도안에 대해서 걱정스러운 점이 두 가지 있다.

  1. 실물 지폐를 확대해서 찍어도 괜찮을까?
  2. 한글이 `세상에서 제일 우수한’ 문자라는 터무니 없는 주장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어쨌든 이 티셔츠는 어느 학부생에게 생일선물로 주었다. 사실은 이 친구에게 선물할 작정으로 생각해 낸 도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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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 티셔츠: 사순흡착음 티셔츠 착용사진

원래는 여러 사람에게 같은 도안을 제공하지 않지만, 유학을 떠나는 선배에게는 예외로 해도 될 것 같다. 그쪽 사람들의 오리엔탈리즘을 자극하려고 한자까지 힘들여서 찍었다. 😛 드디어 제가 만든 도안이 미 합중국의 대도시까지 진출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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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 티셔츠: 언어학자가 입고 있어요

#0 학생으로서 `언어학자’를 자처할 생각은 없지만, `언어학도’는 너무 느끼하고 `언어학과 학생’은 너무 길어서 그냥 `언어학자’로 했다. `언어학자가’와 `입고 있어요’ 사이에 `되고 싶은 꼬꼬마가’를 작게 쓸까도 하다가 `꼬꼬마’가 디씨스럽다는 지적이 있어서 그만두었다.

#1 어느 대학원생에게 준 생일선물: 물론 `아기가 타고 있어요’에서 따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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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른 대학원생에게 준 생일선물: 학내에서 본 자동차 뒤에 `BABY IN CAR’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 따 왔는데, #1보다 약해 보여서 `언어학자 재중’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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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누군가가 `WARNING: SHIRT CONTAINS LINGUIST’라는 문구를 제안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셔츠 속에 언어학자가 들어 있다고 해서 조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철학자나 수학자라면 모를까. 😛

입문대학 어느학과

개인적으로 배척하는 개그 패턴이 두 가지 있다.

  1. 자기비하: 몸으로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으면서 말로만 자기를 비하하는 것.
  2. 동음이의어: 발음의 유사성만 가지고 단어를 바꾸어 쓰는 것.

주변 사람들이 저런 식의 개그를 시도할 때마다 적극적으로 규탄해 온 나로서는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차마 `입문대학 어느학과’라는 말을 꺼내거나 포스팅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저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이야기해볼 만하다.

  1. 어느학과 (2006년 봄)
    1학년생들을 대상으로 한 첫 전공과목의 첫 시간에 선생님께서 해 주신 말이 있다. “누가 과를 물어볼 때 언어학과라고 대답하면, 사람들이 언어학과가 있는 줄 잘 모르니까 `어느 학과’라고 반문했다고 오해할 때가 있었어요.”
  2. 입문대학 (2009년 봄)
    아마 기말고사 기간이었을 것이다. 모처럼 배달 음식을 시켰다. 학내 지리에 밝은 주변 음식점으로 전화를 걸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몇 번씩이나 배달 위치를 다시 말해 달라고 요청하기에, 딱히 못 알아들을 말도 없는데 왜 그럴까 하면서 계속 인문대학[임문대학]이라고 알려 주었다. 이런 일은 처음 겪어 보아서 음식이 제대로 올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배달원은 익숙하게 찾아왔다. 밥을 다 먹고 친구와 돈을 나누려고 영수증을 보니까, 배달 장소가 **대학교 입문대학이라고 적혀 있었다. 뭐, 조음 위치 동화가 표준 발음은 아니니까 [임문대학]으로 오해를 산 것도 내 탓이기는 하다 OTL

언어학과가 존재감이 없다는 사실은 당연할 정도이지만, 인문대학까지 듣보잡이라니 흠좀무.

이름음소점

점이라는 것은 이렇게 터무니없다니까요.

  • 공명음으로만 된 이름을 가진 윤미래 씨는, 성격이 온화하고 다른 사람들과 잘 화합하는 사람입니다. 다만, 너무 온순한 성격 때문에 눈에 띄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안타깝습니다. 자기 의견을 좀 더 적극적으로 개진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 박준형 씨의 이름에서는 자음 음소가 조음 위치 및 조음 방식별로 골고루 분포할 뿐만 아니라 모음에서도 높이와 원순성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방면에 재능을 보이면서 다이내믹한 생활을 즐깁니다. 한 가지에 꾸준하게 몰두하지 못하는 점만 극복한다면 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겠지요.
  • 이휘소 씨의 이름을 발음할 때에는 기류가 막히는 일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한 번 마음먹은 일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진행할 수 있는, 강인한 추진력의 소유자입니다. (이하 생략)

하지만 한국어에서는 한글 표기만으로도 음소를 쉽게 뽑아낼 수 있으니까, 대략 아래와 같은 정도로만 설정해도 그럴 듯하게 프로그램을 짤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실제로 만들거나 믿으면 곤란합니다. 하지만 조음음성학 초급 연습문제로는 괜찮지 않을까요? 🙂

[주요 파라미터]

  • 자음: 조음 위치, 조음 방식, 공명도, 기식성
  • 모음: 높이, 위치, 원순성
  • 음절: 초성 존재 여부, 종성 존재 여부
  • 파라미터 분포의 통일성/다양성

언어학 3종 세트

R: 안녕하세요. 오늘은 /ti/씨가 만든 언어학 아이템 3종 세트를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ti/씨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죠.

T: 네. 티셔츠에 찍을 도안을 구상해 놓기만 하고 몇 달 동안 벼르고만 있던 것들을, 드디어 완성된 물건으로 만들어 내었습니다.

R: 왜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렸나요?

T: 처음에는 도안을 전사 용지에 잉크젯 프린터로 인쇄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하니까 인쇄된 부분이 뻣뻣해져서 넓은 면을 찍을 수가 없겠더라고요. 또 제가 집에 다리미가 없어서, 친구들 다리미를 빌려서 쓰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고요. 그래서 다른 방식을 찾다 보니 몇 달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R: 그러면 오늘 소개할 가방과 티셔츠의 도안은 무슨 방식으로 찍은 건가요?

T: 인터넷에서 검색하다가 티셔츠 스텐실을 쉽게 설명해 놓은 블로그 포스트( http://sugarcube.textcube.com/79 )를 발견해서 참조했습니다. 방금 연결한 포스트에서는 OHP 필름을 사용했지만, 저는 귀찮아서 A4 용지를 그대로 잘라서 썼어요.

R: 그렇군요. 이제 결과물을 하나씩 보도록 할까요?

T: 예. 첫 번째는 사순흡착음 에코백입니다.

R: 앗, 그 일 년 묵은 도안 말이군요?

T: 윽, 아픈 곳을 찌르시다니…… 어쨌든 그 도안이 맞습니다. 아래를 보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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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오. 요즘 에코백이 유행이죠.

T: 네, 여름계절학기가 끝나자마자 동대문종합시장에서 캔버스천을 떠 와서 직접 손으로 만들었습니다. 가내수공업이에요.

R: 고생하셨군요. 그런데 이거 튼튼한가요?

T: 음…… 집에서 시험해 봤는데 대략 3킬로그램 정도는 넣을 만하더군요.

R: 그러면 노트북과 책을 동시에 넣을 수는 없잖아요.

T: 그그그그그렇죠. 죄송합니다.

R: 그리고 다음은요?

T: 음운론의 최적성 이론 중에서 매카시의 Sympathy Theory—한국어 번역어를 몰라서 죄송합니다—를 따 왔습니다. 나머지 두 점과는 달리 단순하게 만들어 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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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원래 도안에는 Sympathetic Candidate를 상징하는 꽃을 든 소녀가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T: 흠흠, 그 그림은 스텐실로 찍어 내기에는 좀 복잡해서…… 윤곽선을 따라 오려서 열전사를 시도해 볼 수는 있겠네요. 어쨌든 이 3종 세트를 받는 대학원생이 제일 관심을 보였던 것은 다음 티셔츠입니다. 이 도안은 스텐실로 찍는 대신에 옷감에 사용할 수 있는 펜으로 직접 그렸습니다. 앞서 소개한 티셔츠는 [최적성 이론]을 사용했으니까 여기에서는 [SPE; Sound Pattern of English (Chomsky and Halle 1968)]에서 소재를 따 왔죠. 나름대로 생성음운론 내에서 이론들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고 했어요. 특히 (적어도 2009년 1학기에 언어학과 학부 4학년 과목 [언어학연습 I]에서 배운 대로는) 최적성 이론이 아직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불투명성(opacity)을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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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이것은 너드를 배격하자는 /ti/씨의 평소 주장과는 상반되는 것 같은데요.

T: 받는 사람이 워낙에 너드라서…… 일단 산뜻한 분홍색을 바탕으로 해서 nerdity를 완화했고요. 도안 자체는 논문을 치우고 술을 먹자는 내용입니다.

R: 변명 같지 않은 변명이지만 넘어가기로 하고요. 도안 설명이 더 필요한 것 같은데요.

T: 예. 우선 첫 번째 줄의 UR, 그러니까 기저형 제일 앞에 논문이 하나 있고, 바로 뒤에는 대학원생 하나, 그 뒤에는 책이 한 무더기로 있죠? 여기에 적용될 수 있는 규칙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1번의 칵테일 삽입 규칙. 저 대학원생 앞에 아무것도 없으면 그 빈자리에 칵테일 한 잔을 넣으라는 뜻입니다. 2번의 논문 삭제 규칙은, 제일 앞에 논문이 있으면 무조건 없애라는 규칙입니다. 이 도안을 대학원생들에게 보여주니까 다들 논문 삭제 규칙을 매우 좋아하더군요.

R: ……

T: 이제 이 두 가지 규칙을 처음에 제시한 기저형에 적용해 보죠. 칵테일 삽입 규칙을 먼저 적용하게 되어 있죠? 그런데 지금 상태로는 이 대학원생 앞이 빈자리가 아니니까 칵테일을 삽입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규칙을 적용하지 못한 채 다음 규칙으로 가야 하죠. 논문 삭제 규칙에서는 논문이 제일 앞에 있을 때 지우게 되어 있으니까, 이 기저형에서 논문을 지울 수 있겠네요. 두 가지 규칙을 모두 거쳤습니다. 그런데 결국 칵테일을 삽입하지 못했잖아요? 만약 두 규칙의 순서가 바뀌었더라면, 논문을 지우고 생긴 빈자리에 칵테일을 삽입할 수 있었겠죠. 다시 말해서, 논문 삭제 규칙이 적용된 결과로서 칵테일 삽입 규칙이 적용될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진다는 겁니다. 이 경우에, 티셔츠에 제시된 순서하에서 논문 삭제 규칙이 칵테일 삽입 규칙을 반급여한다(counterfeed)고 합니다.

R: 그러니까 마지막의 `반급여하지 마!’는 논문은 쓰기 싫고 술은 먹고 싶다는 주인공의 심정을 절실히 표현하는 말이로군요.

T: 바로 그거죠. 그런데 이 3종 세트를 받을 대학원생은 반드시 이 티셔츠를 입고 선생님께 가겠다고 벼르고 있답니다.

R: 용자로군요.

T: 사실 선생님의 반응이 궁금하잖아요.

R: 그 뒷이야기는 다음에 듣도록 하고…… /ti/씨의 언어학 아이템 3종 세트 소개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ti/씨 수고하셨고요, 다음 도안도 기대할게요.

T: 예 고맙습니다.

포르투갈 어의 충격과 공포: 접속법 미래시제

지난해 여름에 브라질 음악을 찾아서 듣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포르투갈 어 발음을 대략 훑고 나서 문장을 해독하려고 사전을 펼쳐 보기 시작할 때이기도 하다. 그때 처음 `꽂힌’ 곡이 노부스 바이아누스(Novos Baianos; 바이아 청년들)의 [내 고향의 삼바(O Samba da Minha Terra)]였다. 노래와 연주가 워낙 신나는 데다가 뜻밖에 가사도 쉽게 해석되어서, 원곡을 작곡한 도리바우 카이미(Dorival Caymmi)가 지은 곡들을 더 찾아보았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다음 노래가 [마라캉갈랴](Maracangalha; 연결된 동영상에서는 2:12부터)였다. 가사는 더 짧고 단순했다. `나 이러다가 포르투갈 어를 너무 빨리 익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근자감에 빠지기 직전, 다행히 후렴구의 문장 덕분에 현실로 돌아왔다.

Se Anália não quiser ir, eu vou só. 아날리아가 가기 싫어하면 나 혼자라도 갈 테야.

문장을 한국어로 옮기기는 어렵지 않은데 `quiser’의 정체가 문제였다. `바라다’라는 뜻인 `querer’의 활용인 듯하지만, 도무지 본 적이 없는 형태였다. 영어나 프랑스 어에서 배웠던 내용에서 유추하자면, 저렇게 생긴 가정문의 조건절에서 동사의 활용은 직설법 현재시제가 될 것 같았다. 하지만 `quiser’가 삼인칭 단수 주어의 직설법 현재시제 활용형처럼 생기지는 않았다. 사전을 뒤져보니 접속법 미래시제라고 한다. 접속법도 알고 미래시제도 알지만, 그 둘이 결합한 것은 처음 보았다. 좀 의아하기는 했지만 당장 문법을 공부할 생각은 없었고 일단 노래를 따라 부르기에 급급해서 곧 잊었다.

그러고 꼬박 한 해가 지났다. 작년에 사서 묵혀 둔 포르투갈어 문법책을 인제야 제대로 읽기 시작했다. ((이승덕, 한국인을 위한 브라질 포어 (서울: 명지출판사, 1997). )) 처음 절반까지는 쉽게 넘어갔다. 그러다가 동사의 부정형(不定形)이 수와 인칭에 따라 변화한다는 대목에서 비명을 지르고, 접속법 과거완료가 `조동사+과거분사’ 복합형 이외에도 별도의 단순활용형이 있다는 부분에서 목이 메다가, 접속법 미래시제를 보고는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뜯었다. 고작 이틀 전에, 여름계절학기 [[스페인어입문 2]] 에서 “접속법은 기본적으로 현재 일어나지 않는 상황을 표현하는 것이니까 미래시제가 따로 필요 없지요.” 하는 말을 들으면서 당연하다는 듯 끄덕거리고 있었단 말이다.

어쨌든 일 년 전의 `quiser’가 곧 떠올라서 간신히 인정했지만, 도저히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고작 프랑스 어와 카스티야 어만 본 주제에, 적어도 로망스 어에 관한 한 아래와 같은 형식이 가슴속에 단단히 박혀 버린 탓이다. 마침 영어의 가정문과 맞아떨어지기도 하고.

  1. 단순히 조건과 결과를 서술하는 경우 (예: `내일 날씨가 맑으면 소풍 가야지.’)
    조건절: 직설법 현재시제 / 주절: 직설법 미래시제
  2. 현재 사실에 반대되는 내용을 가정하는 경우 (예: `지금 쟤만 안 왔으면 분위기가 딱 좋았는데.’)
    조건절: 접속법 과거시제 불완료상 / 주절: 조건법(=가능법=과거미래)
  3. 과거 사실에 반대되는 내용을 가정하는 경우 (예: `일찍 도착했으면 술을 마실 수 있었는데.’)
    조건절: 접속법 과거시제 완료상 / 주절: 조건법 완료상

그런데 포르투갈 어에서는 `1. 단순히 조건과 결과를 서술하는 경우’의 조건절에 접속법 미래시제를 쓴다. `오오 조건절의 동사를 접속법으로 통일하다니 근성 있다!’ 하고 감동하는 동시에 ((사실 포르투갈 어에서도 이 경우에 직설법 현재시제를 써도 된다.)) `아무리 그래도 접속법에다 미래시제라니! 접속법에다 미래시제라니!’ 하면서 거부감이 들고, 여러모로 복잡한 기분이었다.

이튿날, 그러니까 오늘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도 계속 신경이 쓰였다. 다른 로망스 어에서는 더는 쓰이지 않는 것이 ((이탈리아 어 사전의 동사 변화표에도 접속법 미래시제는 없었다. 설마 루마니아 어나 갈리시아 어, 카탈루냐 어에 남아 있을까?)) 포르투갈 어에만 남아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 다른 어파에서는 어떨지 궁금해진다. 그러다가 2008년 2학기 [[인구어학]] 수업에서, 현재 사용되는 인도유럽 어 중에서 법(法;mood)이 제일 세분화된 언어는 러시아 어라고 배웠던 것이 기억났다. 그렇다면 법마다 시제나 상이 좀더 풍부하게 있지 않을까? 마침 아는 노어노문학과 대학원생도 있겠다, 당장 물어보아야겠…… 아차, 지금 새벽 5시 30분이었지. 두 시간을 꾹꾹 참다가 문자를 보냈다. 나중에 온 긴 답문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없다는 것이고, 좀 더 설명하자면 러시아 어에는 애초에 미래시제가 없고 과거/비과거의 구분만 있다는 것이다. `1. 단순히 조건과 결과를 서술하는 경우’의 조건절에는 물론 직설법 현재시제, 여기까지는 좋은데 특이하게도 완료상을 쓴다.

어쨌든 러시아 어에도 접속법 미래시제가 없다고 하니까, 학교 안팎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현대어 중에서 접속법 미래시제형을 가진 언어는 포르투갈어가 거의 유일한 듯하다. 애초에 달라질 상황도 없었지만, 이야기를 하고 나니 마음이 가라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