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미트리 군이 진작에 그 삼천 루블이 잘 보이도록 티셔츠에 박아놓고 다녔다면 오해 없이 메데타시 메데타시 하고 끝났을 텐데 말입니다.”
일만원권 티셔츠를 보고 지폐 도안에 관심을 주신 도덕후 ((도스토옙스키 오타쿠.)) 한 분을 위한 도안이다. 처음 말이 나오고부터 티셔츠에 찍어서 드리기까지 거의 일 년이 걸렸으니 면목이 없다. 트위터의 ntrolls 님께서 만들어 주신 원본을 수정해서 봉투의 내용물 부분을 좀 더 키우고는 19세기 후반의 일백 루블 지폐 그림을 찾아 넣었다. 이래서야 삼천 루블이 아니라 삼백 루블 같지만, 소설에서는 백 루블짜리 지폐 서른 장이라고 했으니까 각 지폐 그림이 사실 열 장짜리 한 묶음이라고 우겨야겠다.
도스토옙스키 도안을 이어가자면 역시 외투 옆자락에 “도끼가 들어 있어요”라고 새겨야. ((죄와 벌.))
마지막으로 티셔츠 도안을 찍은 지가 얼마나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찍은 지”와 “되었는지”의 띄어쓰기에 유의합시다.)) 오랜만에 글씨를 칼로 오리자니 손이 통 말을 듣지 않았다. 한 시간이면 너끈히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두 시간이나 걸렸다. ti의 기력이 -20 감소하였다! 프라이드가 -5 감소하였다!
티셔츠를 받은 분의 착용 인증샷을 따로 찍지 않았으므로, 모양과 크기를 가늠하기 위해 글꼴과 크기를 명시하였다.
SHIRT CONTAINS MATHEMATICIAN
Gill Sans, 60pt
언어학자는 소화하기 힘든 너드템. 오직 수학자만이 입을 수 있다.
마침 MATHEMATICIAN으로 하니까 글자 크기나 장평 및 자간 등을 조절하지 않고도 SHIRT CONTAINS와 폭이 딱 맞아서 좋다.
착용 사진이 없으니까 크기를 가늠하기 어렵겠지만, 저 글자 하나가 A4용지 한 장에 꽉 들어찬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티셔츠 앞면 오른쪽 아랫부분에 찍어서 글자가 배꼽과 옆구리 사이에 들어온다.
금문(金文, Bronze inscriptions)이라고 찍기는 했는데, 위 책에 있는 글자와는 퍽 느낌이 다르다. ((참고문헌 서지사항을 생략하는 만행을 저질러서 죄송합니다. 며칠 내로 보충해 넣겠어요.)) 청동기 주형에 새기는 것과 천에 물감을 찍는 것이 같을 수는 없겠지만, 티셔츠에 찍은 글자는 획에 힘이라고는 없이 그저 둥글기만 해서 썩 기분이 나지는 않는다. 애초에 그릇이나 악기, 칼에 박는 글자를 옷에 그리는 것이 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0 학생으로서 `언어학자’를 자처할 생각은 없지만, `언어학도’는 너무 느끼하고 `언어학과 학생’은 너무 길어서 그냥 `언어학자’로 했다. `언어학자가’와 `입고 있어요’ 사이에 `되고 싶은 꼬꼬마가’를 작게 쓸까도 하다가 `꼬꼬마’가 디씨스럽다는 지적이 있어서 그만두었다.
#1 어느 대학원생에게 준 생일선물: 물론 `아기가 타고 있어요’에서 따 왔다.
#2 다른 대학원생에게 준 생일선물: 학내에서 본 자동차 뒤에 `BABY IN CAR’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 따 왔는데, #1보다 약해 보여서 `언어학자 재중’을 덧붙였다.
#3 누군가가 `WARNING: SHIRT CONTAINS LINGUIST’라는 문구를 제안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셔츠 속에 언어학자가 들어 있다고 해서 조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철학자나 수학자라면 모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