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학 3종 세트

R: 안녕하세요. 오늘은 /ti/씨가 만든 언어학 아이템 3종 세트를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ti/씨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죠.

T: 네. 티셔츠에 찍을 도안을 구상해 놓기만 하고 몇 달 동안 벼르고만 있던 것들을, 드디어 완성된 물건으로 만들어 내었습니다.

R: 왜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렸나요?

T: 처음에는 도안을 전사 용지에 잉크젯 프린터로 인쇄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하니까 인쇄된 부분이 뻣뻣해져서 넓은 면을 찍을 수가 없겠더라고요. 또 제가 집에 다리미가 없어서, 친구들 다리미를 빌려서 쓰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고요. 그래서 다른 방식을 찾다 보니 몇 달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R: 그러면 오늘 소개할 가방과 티셔츠의 도안은 무슨 방식으로 찍은 건가요?

T: 인터넷에서 검색하다가 티셔츠 스텐실을 쉽게 설명해 놓은 블로그 포스트( http://sugarcube.textcube.com/79 )를 발견해서 참조했습니다. 방금 연결한 포스트에서는 OHP 필름을 사용했지만, 저는 귀찮아서 A4 용지를 그대로 잘라서 썼어요.

R: 그렇군요. 이제 결과물을 하나씩 보도록 할까요?

T: 예. 첫 번째는 사순흡착음 에코백입니다.

R: 앗, 그 일 년 묵은 도안 말이군요?

T: 윽, 아픈 곳을 찌르시다니…… 어쨌든 그 도안이 맞습니다. 아래를 보아 주세요.

4lab_bag_1

R: 오. 요즘 에코백이 유행이죠.

T: 네, 여름계절학기가 끝나자마자 동대문종합시장에서 캔버스천을 떠 와서 직접 손으로 만들었습니다. 가내수공업이에요.

R: 고생하셨군요. 그런데 이거 튼튼한가요?

T: 음…… 집에서 시험해 봤는데 대략 3킬로그램 정도는 넣을 만하더군요.

R: 그러면 노트북과 책을 동시에 넣을 수는 없잖아요.

T: 그그그그그렇죠. 죄송합니다.

R: 그리고 다음은요?

T: 음운론의 최적성 이론 중에서 매카시의 Sympathy Theory—한국어 번역어를 몰라서 죄송합니다—를 따 왔습니다. 나머지 두 점과는 달리 단순하게 만들어 보았어요.

sympa_1

R: 원래 도안에는 Sympathetic Candidate를 상징하는 꽃을 든 소녀가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T: 흠흠, 그 그림은 스텐실로 찍어 내기에는 좀 복잡해서…… 윤곽선을 따라 오려서 열전사를 시도해 볼 수는 있겠네요. 어쨌든 이 3종 세트를 받는 대학원생이 제일 관심을 보였던 것은 다음 티셔츠입니다. 이 도안은 스텐실로 찍는 대신에 옷감에 사용할 수 있는 펜으로 직접 그렸습니다. 앞서 소개한 티셔츠는 [최적성 이론]을 사용했으니까 여기에서는 [SPE; Sound Pattern of English (Chomsky and Halle 1968)]에서 소재를 따 왔죠. 나름대로 생성음운론 내에서 이론들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고 했어요. 특히 (적어도 2009년 1학기에 언어학과 학부 4학년 과목 [언어학연습 I]에서 배운 대로는) 최적성 이론이 아직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불투명성(opacity)을 강조했습니다.

counterfeed_1

R: ……이것은 너드를 배격하자는 /ti/씨의 평소 주장과는 상반되는 것 같은데요.

T: 받는 사람이 워낙에 너드라서…… 일단 산뜻한 분홍색을 바탕으로 해서 nerdity를 완화했고요. 도안 자체는 논문을 치우고 술을 먹자는 내용입니다.

R: 변명 같지 않은 변명이지만 넘어가기로 하고요. 도안 설명이 더 필요한 것 같은데요.

T: 예. 우선 첫 번째 줄의 UR, 그러니까 기저형 제일 앞에 논문이 하나 있고, 바로 뒤에는 대학원생 하나, 그 뒤에는 책이 한 무더기로 있죠? 여기에 적용될 수 있는 규칙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1번의 칵테일 삽입 규칙. 저 대학원생 앞에 아무것도 없으면 그 빈자리에 칵테일 한 잔을 넣으라는 뜻입니다. 2번의 논문 삭제 규칙은, 제일 앞에 논문이 있으면 무조건 없애라는 규칙입니다. 이 도안을 대학원생들에게 보여주니까 다들 논문 삭제 규칙을 매우 좋아하더군요.

R: ……

T: 이제 이 두 가지 규칙을 처음에 제시한 기저형에 적용해 보죠. 칵테일 삽입 규칙을 먼저 적용하게 되어 있죠? 그런데 지금 상태로는 이 대학원생 앞이 빈자리가 아니니까 칵테일을 삽입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규칙을 적용하지 못한 채 다음 규칙으로 가야 하죠. 논문 삭제 규칙에서는 논문이 제일 앞에 있을 때 지우게 되어 있으니까, 이 기저형에서 논문을 지울 수 있겠네요. 두 가지 규칙을 모두 거쳤습니다. 그런데 결국 칵테일을 삽입하지 못했잖아요? 만약 두 규칙의 순서가 바뀌었더라면, 논문을 지우고 생긴 빈자리에 칵테일을 삽입할 수 있었겠죠. 다시 말해서, 논문 삭제 규칙이 적용된 결과로서 칵테일 삽입 규칙이 적용될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진다는 겁니다. 이 경우에, 티셔츠에 제시된 순서하에서 논문 삭제 규칙이 칵테일 삽입 규칙을 반급여한다(counterfeed)고 합니다.

R: 그러니까 마지막의 `반급여하지 마!’는 논문은 쓰기 싫고 술은 먹고 싶다는 주인공의 심정을 절실히 표현하는 말이로군요.

T: 바로 그거죠. 그런데 이 3종 세트를 받을 대학원생은 반드시 이 티셔츠를 입고 선생님께 가겠다고 벼르고 있답니다.

R: 용자로군요.

T: 사실 선생님의 반응이 궁금하잖아요.

R: 그 뒷이야기는 다음에 듣도록 하고…… /ti/씨의 언어학 아이템 3종 세트 소개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ti/씨 수고하셨고요, 다음 도안도 기대할게요.

T: 예 고맙습니다.

5 thoughts on “언어학 3종 세트”

  1. Sympathetic Candidate -> 어느 책에서 ‘공감후보’라고 번역되어진 것을 보았음. 저도 다음 도안 기대할게요.

    1. 그러면 sympathy theory는 공감이론이겠군요. 왠지 이름만 보고 은유적으로 해석할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 그런 점에서는 언어학이 인지도가 낮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하하하.

      다음 도안은 역사비교언어학이나 통사·의미론에서 시도해 보겠습니다. 물론 희망사항이고요. 음……

  2. “받는 사람이 워낙에 너드라서…… ”
    “용자로군요.” 두 구절 데려갑니다. 뒷담화를 두려워해주세요.

    1. 앗, 너드는 몰라도 용자는 제가 먼저 쓴 단어가 아닌데…… 뒷얘기는 감수하겠습니다만 이 블로그는 비밀로 해 주세요. 엉엉엉.

      그나저나, 여기 등장한 대학원생이 본인임을 굳이 직접 밝혀 버리셨으니까, 착용 사진 포스팅은 생략해야겠군요.

  3. 응? 첫 줄은 상당히 상처가 되는 코멘트군. 언제나 공지 확인은 필수져. 전 선량한 누리꾼이니까여.
    어차피 얼굴 안 찍혀서 착용사진 올리는 건 상관없을 것 같은데. 길에서 누가 알아보면 같이 기뻐해주는 거죠.
    다만 뱃살이… 참치로 태어났으면 사랑받았을 것을… ㅠ_ㅠ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