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여름에 브라질 음악을 찾아서 듣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포르투갈 어 발음을 대략 훑고 나서 문장을 해독하려고 사전을 펼쳐 보기 시작할 때이기도 하다. 그때 처음 `꽂힌’ 곡이 노부스 바이아누스(Novos Baianos; 바이아 청년들)의 [내 고향의 삼바(O Samba da Minha Terra)]였다. 노래와 연주가 워낙 신나는 데다가 뜻밖에 가사도 쉽게 해석되어서, 원곡을 작곡한 도리바우 카이미(Dorival Caymmi)가 지은 곡들을 더 찾아보았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다음 노래가 [마라캉갈랴](Maracangalha; 연결된 동영상에서는 2:12부터)였다. 가사는 더 짧고 단순했다. `나 이러다가 포르투갈 어를 너무 빨리 익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근자감에 빠지기 직전, 다행히 후렴구의 문장 덕분에 현실로 돌아왔다.
Se Anália não quiser ir, eu vou só. 아날리아가 가기 싫어하면 나 혼자라도 갈 테야.
문장을 한국어로 옮기기는 어렵지 않은데 `quiser’의 정체가 문제였다. `바라다’라는 뜻인 `querer’의 활용인 듯하지만, 도무지 본 적이 없는 형태였다. 영어나 프랑스 어에서 배웠던 내용에서 유추하자면, 저렇게 생긴 가정문의 조건절에서 동사의 활용은 직설법 현재시제가 될 것 같았다. 하지만 `quiser’가 삼인칭 단수 주어의 직설법 현재시제 활용형처럼 생기지는 않았다. 사전을 뒤져보니 접속법 미래시제라고 한다. 접속법도 알고 미래시제도 알지만, 그 둘이 결합한 것은 처음 보았다. 좀 의아하기는 했지만 당장 문법을 공부할 생각은 없었고 일단 노래를 따라 부르기에 급급해서 곧 잊었다.
그러고 꼬박 한 해가 지났다. 작년에 사서 묵혀 둔 포르투갈어 문법책을 인제야 제대로 읽기 시작했다. ((이승덕, 한국인을 위한 브라질 포어 (서울: 명지출판사, 1997). )) 처음 절반까지는 쉽게 넘어갔다. 그러다가 동사의 부정형(不定形)이 수와 인칭에 따라 변화한다는 대목에서 비명을 지르고, 접속법 과거완료가 `조동사+과거분사’ 복합형 이외에도 별도의 단순활용형이 있다는 부분에서 목이 메다가, 접속법 미래시제를 보고는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뜯었다. 고작 이틀 전에, 여름계절학기 [[스페인어입문 2]] 에서 “접속법은 기본적으로 현재 일어나지 않는 상황을 표현하는 것이니까 미래시제가 따로 필요 없지요.” 하는 말을 들으면서 당연하다는 듯 끄덕거리고 있었단 말이다.
어쨌든 일 년 전의 `quiser’가 곧 떠올라서 간신히 인정했지만, 도저히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고작 프랑스 어와 카스티야 어만 본 주제에, 적어도 로망스 어에 관한 한 아래와 같은 형식이 가슴속에 단단히 박혀 버린 탓이다. 마침 영어의 가정문과 맞아떨어지기도 하고.
- 단순히 조건과 결과를 서술하는 경우 (예: `내일 날씨가 맑으면 소풍 가야지.’)
조건절: 직설법 현재시제 / 주절: 직설법 미래시제
- 현재 사실에 반대되는 내용을 가정하는 경우 (예: `지금 쟤만 안 왔으면 분위기가 딱 좋았는데.’)
조건절: 접속법 과거시제 불완료상 / 주절: 조건법(=가능법=과거미래)
- 과거 사실에 반대되는 내용을 가정하는 경우 (예: `일찍 도착했으면 술을 마실 수 있었는데.’)
조건절: 접속법 과거시제 완료상 / 주절: 조건법 완료상
그런데 포르투갈 어에서는 `1. 단순히 조건과 결과를 서술하는 경우’의 조건절에 접속법 미래시제를 쓴다. `오오 조건절의 동사를 접속법으로 통일하다니 근성 있다!’ 하고 감동하는 동시에 ((사실 포르투갈 어에서도 이 경우에 직설법 현재시제를 써도 된다.)) `아무리 그래도 접속법에다 미래시제라니! 접속법에다 미래시제라니!’ 하면서 거부감이 들고, 여러모로 복잡한 기분이었다.
이튿날, 그러니까 오늘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도 계속 신경이 쓰였다. 다른 로망스 어에서는 더는 쓰이지 않는 것이 ((이탈리아 어 사전의 동사 변화표에도 접속법 미래시제는 없었다. 설마 루마니아 어나 갈리시아 어, 카탈루냐 어에 남아 있을까?)) 포르투갈 어에만 남아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 다른 어파에서는 어떨지 궁금해진다. 그러다가 2008년 2학기 [[인구어학]] 수업에서, 현재 사용되는 인도유럽 어 중에서 법(法;mood)이 제일 세분화된 언어는 러시아 어라고 배웠던 것이 기억났다. 그렇다면 법마다 시제나 상이 좀더 풍부하게 있지 않을까? 마침 아는 노어노문학과 대학원생도 있겠다, 당장 물어보아야겠…… 아차, 지금 새벽 5시 30분이었지. 두 시간을 꾹꾹 참다가 문자를 보냈다. 나중에 온 긴 답문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없다는 것이고, 좀 더 설명하자면 러시아 어에는 애초에 미래시제가 없고 과거/비과거의 구분만 있다는 것이다. `1. 단순히 조건과 결과를 서술하는 경우’의 조건절에는 물론 직설법 현재시제, 여기까지는 좋은데 특이하게도 완료상을 쓴다.
어쨌든 러시아 어에도 접속법 미래시제가 없다고 하니까, 학교 안팎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현대어 중에서 접속법 미래시제형을 가진 언어는 포르투갈어가 거의 유일한 듯하다. 애초에 달라질 상황도 없었지만, 이야기를 하고 나니 마음이 가라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