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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근의 인증 거부를 지지하며

박정근북한의 조국통일평화위원회에서 운영한다고 알려진 트위터 계정 우리민족끼리의 트윗을 리트윗한 일로 국가보안법 제7조 찬양·고무 혐의를 받고 2011년 9월 21일 집과 가게가 압수수색이 된 뒤 여러 차례 경찰조사를 받은 끝에 2012년 1월 11일에 구속되었다.

리트윗의 맥락과 박정근의 정치적 성향을 보았을 때 그에게 찬양고무 혐의를 적용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지적은 그동안 여러 곳에서 계속 나왔다. ((박정근이 자신에게 적용된 혐의가 부적절한지를 인증하지 않았음을 지지하는 포스트이므로, 이 문장에서만큼은 맥락과 성향이 구체적으로 어떠한지에 대한 링크를 생략하겠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청년이 어쩌다가 농담 때문에 꽉 막힌 국가권력의 핍박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쉽게 떠오르는 동시에, 여러 현장에서 연대해 온 좌파정당 활동가가 국가보안법을 빌미로 정권의 탄압을 받는다는 이야기도 호응을 얻고 있다. ((박정근의 구속영장에 찬양고무보다 연대활동에 대한 내용이 더 많다는 트윗이 100회 이상 리트윗되었으나, 실제로 구속영장에 첨부된 범죄사실의 요지에는 ‘이적표현물 384건을 취득·반포하고, 북한 주의·주장에 동조하는 글 200건을 작성[하여] 팔로워들에게 반포하였으며, 학습을 위하여 이적표현물인 북한 원전 ‘사회주의문화건설리론’을 취득 보관’했다는 찬양고무에 대한 내용밖에 없다. 연대활동을 언급한 것은 압수수색영장이다.))

별짓을 하지도 않았는데 만만해서 걸렸다는 것이든 바른 일을 하다가 국가의 눈 밖에 나서 걸렸다는 것이든, 박정근이 ‘당해도 싼 짓’을 하지는 않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당해도 싼 짓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당해도 싼 짓이 따로 존재함을 전제하고 있는 듯하다. 이 주장이 누가 어떠한 짓을 하든 당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주장과 동시에 성립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물론, 법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비판은 법이 잘못 적용되었다는 비판과 양립 가능하다. 부당한 법을 부당한 방식이나 절차로 적용하는 상황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국가보안법 자체도 악법이거니와, 이번 사건에서는 국가보안법을 적용할 근거조차 없다.’ 라고 서술하면 공안당국의 뻘짓이 더욱 부각되고 박정근이 겪은 탄압에 더 많은 사람들이 분노해 주지 않겠는가?

그러나 박정근은 자신에게 유리한 정황을 모조리 동원하여 이 사건에서 수사기관의 부조리를 폭로하는 일에 중점을 두지 않았다. 구속영장 실질심사 전날인 1월 10일에 그는 자신이 종북주의자인지 아닌지를 일부러 모호하게 내버려두고는 양심의 자유가 이러한 경우에까지 보편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경찰수사 후에도 우리민족끼리의 트윗을 계속 리트윗하면서 서울 시내에 국가보안법 폐지 삐라를 뿌리고 현수막을 내거는 등 수사기관에 대한 도발로 보일 수 있는 일을 벌여 왔다. ((분명히 이러한 행동들은 검찰에서 그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을 터이다. 구속되기 전날 작성한 트윗을 보면 그 자신도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던 듯하지만, 『한겨레』 기사를 보면 ‘도발’을 시작할 때부터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가 얼마나 일관되고 진지했는지를 가늠해 볼 만할 만한 자료를 더 찾지는 않겠다. 그의 일관성 및 진지함 여부는 그에 대한 처벌이 정당한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진지하다고 해서, 또 진지해야만 꼭 존중받을 자격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장난이라고 해서, 또 장난이어야만 꼭 관용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지금 박정근을 지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나는 종북주의자가 아니지만’이라는 단서를 미리 못박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자기 개인이 발언할 자격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 보편적인 권리를 제한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왔다. 예를 들어 ‘나도 군필이지만’, ‘내가 동성에게 성욕을 느끼지는 않지만’, ‘내 아이는 사교육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도 좋은 성적을 얻었지만’ 같은 말부터 꺼낸 다음 군대 문화·정책이나 성소수자 차별, 입시 위주 교육 등을 비판하면 욕을 덜 먹고 심지어 ‘개념’있다는 칭찬을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러한 인증이 설득력을 얻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청자와 화자가 모두 특정한 자격을 내세울 수 있어야만 비판을 할 권리가 더 생긴다는 인식에 기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상대가 특정한 자격을 요구하는 것이 정당한지를 고민해 보지 않은 채 당장 한 차례의 논쟁에서 우위를 점하겠다고 인증에 응한다면, 상대는 그 자리에서는 물러설지 모르나 결국 인증할 것이 없는 이들을 골라서 더욱 집중적으로 공격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실을 밝힘으로써 부당한 공격을 피하려는 것을 비겁하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소수자가 겪는 차별과 위험을 소수자가 아닌 이가 모두 똑같이 겪어야 한다는 주장도 온당하지 않고.))

박정근은 인증하지 않았다. 순결한 피해자를 자처하지도 않았다.

말의 효과: (1) 진리치를 넘어서

노신(魯迅, 한어병음: Lu Xun, 한글 외래어 표기: 루쉰)(1881–1936)의 산문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논점 세우기(立論)

노신, 1925년 작. 『들풀(野草)』에 수록.
원문: http://zh.wikisource.org/wiki/%E7%AB%8B%E8%AB%96

꿈에서 나는, 초등학교 교실에서 글을 짓기 위해 교사에게 논점을 세우는 방법을 묻고 있었다.

“어렵지!”

교사는 안경 너머로 비스듬히 눈빛을 보내더니 나를 보고는 말했다.

“너에게 이야기를 하나 해 주마— 어느 집에서 아들을 낳고는 온 집안이 뛸 듯이 기뻐했지. 한 달을 채우자 아기를 안고 나가서 손님들에게 보여 주었단다—  당연히 덕담을 들었으면 해서겠지.
어떤 사람은 ‘이 아기는 앞으로 돈을 많이 벌 겁니다.’ 라고 했어. 그래서 최고의 감사를 받았고.
어떤 사람은 ‘이 아기는 앞으로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라고 했어. 그리고는 온 집안사람들에게 호되게 맞았지.
반드시 죽는다는 말은 필연적이지만, 부귀를 누린다는 말은 허황되잖아. 그런데 허황된 말을 하면 좋은 보답을 받고, 필연적인 말을 하면 매를 맞아. 너는…”

“저는 허황된 소리도 안 하고 싶고, 매도 안 맞고 싶어요. 선생님, 그러면 어떻게 말해야 하죠?”

“그러면, 이렇게 말해 보렴. `우와! 이 아기 좀 봐요! 어쩜… 아유! 하하! Hehe! he, hehehehe!'”

1925년 7월 8일

<마지레스>허황된 소리도 하지 않고 매도 맞지 않으려면 “나는 이 아이가 부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면 되지 않는가? 부자가 되리라는 장담에 비하자면 “최상의 감사 인사”야 받지 못하겠지만, 소박한 답례 정도는 들을 수 있을 터이다.</마지레스>

노 선생은 이 이야기에서 진실을 말하는 데에 고난이 따르는 현실을 풍자하고 싶었던 듯하나, 이 이야기의 진정한 교훈은 진리치가 참인 명제라고 해서 다 유의미한 말이 되지는 못한다는 데 있는 것 같다.

하필이면 이 이야기가 덕담을 (( 오덕이나 덕후의 덕 말고. )) 요구하는 상황인 만큼, 이것이 청자에게 불쾌감을 주면 안 된다는 예의의 문제라고만 생각할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 사실, 많다. 심지어는 “청자의 감정을 자극할 만한 사실은 말하기를 보류하는 편이 좋겠지요.” 같은 “매너”로만 해석하기도 한다. )) 하지만 아래의 만화를 보면…

"내일 눈이 오거나, 아니면 오지 않는다."라는 진술은 어떤가? 이 진술은 '공허한 형식'이지만 완벽한 진리야! 맞아요. 하지만 내일의 날씨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진리죠!
『로지코믹스』(독시아디스, 파파디미트리우 글, 파파다토스, 디 도나 그림 / 전대호 역 / 랜덤하우스 코리아) 264면.

[그림 속 텍스트 시작]
러셀: “내일 눈이 오거나, 아니면 오지 않는다.”라는 진술은 어떤가? 이 진술은 ‘공허한 형식’이지만 완벽한 진리야!
비트겐슈타인: “맞아요. 하지만 내일의 날씨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진리죠!”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20년간 항진명제를 생산하는 기계의 존재를 정당화하려고 비지땀을 흘린 것이었다.
[그림 속 텍스트 끝]

물론 나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대하여 전혀 아는 바가 없고, “사람은 다 죽는다.”라는 명제가 위 만화에서 말하는 항진명제에 해당하지는 않으므로, 위에서 인용한 부분을 여기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 “내일 눈이 오거나, 아니면 오지 않는다.” 대신 “내일의 일일강수량은 0 mm 이상 1000 mm 미만이다.”라는 명제는 어떨까? 이 명제가 참이 되는 것은 논리적 형식이 아니라 현재의 실제 세계의 조건에 근거하였으므로 러셀의 관심사는 아닐 터이지만, 이 “진리”도 내일 날씨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 어쨌든 반드시 죽는다는 것은 사람이라면 모두 겪게 되는 일이고, 이 아기의 장래에 관해서는 새롭고 유의미한 사실이 아니다. 이 말이 담화에 기여할 수 있는 상황을 여러 가지로 구성해 볼 수야 있다.

(1) 부모가 망상에 빠져서 아기가 절대로 죽지 않으리라고 믿는 경우:
일반적인 진리를 부모가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것이 명백하므로, 부모에게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의미가 있다. (( 부모가 아기에게까지 그러한 망상을 주입하려고 들거나 아기를 어떻게 다루어도 죽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학대라도 하지 않는 한 꼭 알려줄 필요가 있는지는 모르겠다(후다닥). ))

(2) 의사가 병에 걸린 아이의 소생 가능성을 진단하는 경우:
이 때 아기가 반드시 죽으리라는 것은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어떠한 이유로든 죽게 되어 있다는 일반적인 진리가 아니라, 죽는 시기와 원인을 어느 정도 특정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건을 가리킨다.

더 가능한 상황이야 무한히 많이 있을 수 있겠으나, (1)에서처럼 일반적인 진리 자체가 명시적으로 부정된 것을 바로잡아야만 하거나 (2)에서처럼 같은 문장이라도 일반적인 진리 이상의 구체적인 의미를 더 포함해야 할 것이다. 이 이야기의 상황이 이러한 조건을 만족하는 것 같지는 않다. (( 어머니는 내가 아기일 때 어느 어르신에게 “닥터감”이라는 말을 들었다면서 내가 의사가 되려고 하면 될 수 있다고 20년도 넘게 믿은 듯하니까 (1)을 만족할지도 모르겠…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 아이는 절대로 죽지 않을 것입니다.”를 “이 아이는 앞으로 의사가 될 것입니다.”만큼 진지하게 들을 리는 없… 하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생”으로 받아들이고 은혜로워할 것 같… 아마 안 될 거야. orz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