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오랫동안 싫어해 온 행동을 해 버렸다. 자기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대접하라는 것이 황금률이지만, 내가 받고 싶어하는 것을 받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도 해야 한다. 내가 몇 년 동안 줄기차게 내세운 주장이었다. 그런데 특히 지난 일이 주 동안, 머릿속에서 나 같으면 상관없다는 판단이 선 즉시 상대에게 그대로 해 버린 언행이 적지 않다. 그 때문에 감정이 상했거나 곤란한 일을 겪었을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잘못은, `저 사람도 이런 것은 안 따지겠지? 안 따질 거야.’ 따위의 생각조차 들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젊음이나 패기, 열정을 가지고 무엇인가에 도전할 생각이 없다. 냉큼 덧붙이자면, 그렇다고 해서 (물론 내가 자신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으나) 무기력하거나 자포자기한 것은 아니다. 내가 시도해 보는 일들이 하나같이 사소하기는 해도, 그 가짓수가 적지는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그저 나는, (i) 혹시라도 심각하고 거창한 일을 하더라도 `도전’이라는 말을 `시도’ 이상으로 긍정적인 뜻으로 쓰고 싶지는 않고, ((상황을 싸움이나 전쟁에 빗대는 경우가 너무 많은 것 같다. 한국 사회, 혹은 한국어에서 이런 현상이 특히 심하다는 글을 최근에 어느 블로그에서 읽었는데, 어디였더라……? 끙끙끙. 긁적긁적.)) (ii) 할 만한 동기와 이유가 있는 일을 하는 것은 젊은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전제가 싫은 것뿐이다. ((할 만한 동기와 이유가 있는 일이 있을 때 주위의 시선 등을 고려하지 않고 지르는 것이야말로 젊음의 증거, 혹은 `젊음’의 정의라고 할 수도 있겠다. 증거라고 한다면, 나는 기믹질을 하면서 놀 때가 아니고서는 스스로 젊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정의라고 한다면, 왜 그렇게까지 `젊음’의 외연을 넓히고 싶어하는지 묻겠다.)) 메롱.
행동의 동기나 이유보다 젊음이 부각되는 것만 해도 전혀 동의할 수 없는데, 하물며 어떤 일에 대해서 그 일을 해야 할 이유를 제시하거나 들을 생각도 없이 젊다는 것 자체로 충분한 동기가 된다고 해 버린다면 그나마 진지하게 대답을 준비하려고 했던 것이 억울해진다.
“한번 해 봐, 젊으니까.”
어른이나 늙은이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여기서 `젊으니까’라고 말한 것은 웬만하면 `무기력한 내가 못 이룬 꿈을 네가 실현해야만 하니까’ 아니면 `지금 네가 하는 짓은 어차피 진정성 없는 치기니까’ 둘 중 하나로 들어야 할 터이다. 일일이 정색하면서 부정할 필요조차 없을 것 같다.
해마다 다이어리에 넣을 A5 용지 크기의 달력을 자체 제작하는 훈훈한 습관이 있었다. 음력 날짜, 24절기, 기념일 등을 찾아서 채워 넣는 재미가 쏠쏠했지만, 손 시림과 귀찮음을 이기지 못하고 올해부터는 구글 달력에서 인쇄하기로 했다. [설정]에서 보조 달력으로 중국 달력을 선택해서 음력 날짜와 24절기를 넣고, 대한민국 휴일 달력도 추가했다. 그래도 허전했다. 3월 8일이나 4월 20일 칸이 비어 있는 것을 아쉬워하다가, 앙겔부처님이 진보넷 달력에 사용한 기념일 목록을 통째로 넣자는 생각이 들었다. 기왕이면 매년, 또 아무 곳에서나 쓸 수 있도록 iCAL에서 ICS 파일로 만들었다.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고 그것이 신경쓰일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부분을 없앨 만할 실천을 하는 것이다. 당장 할 수 없다면 계획을 세울 수도 있다. 아니면 자기 생각을 바꾸어서 그 부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괜찮다. 적어도 신경을 쓰는 것만이라도 그만두든가. 어쨌든 마음에 걸리는 것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에게 좋을 일은 없다. 게다가 그런 것을 가지고 있다가는 십중팔구 자기가 무엇인가에 대해 고뇌하고 있다는 자의식까지 생겨 버려서, 고민을 계속하기 위해서라도 행동을 포기하게 된다. (( 많은 예술 작품이 이런 갈등에서 나왔겠지만, 그런 고민을 한다고 꼭 예술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 )) 😛
휴대전화를 쓴 지 이 년이나 지났는데도 그 물건을 사용하는 나 자신에게 도저히 익숙해질 수가 없어서, 마음 편해지려고 사용을 해지했다. 만족스럽다.
덧붙임: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따로 없다. 처음부터 그 물건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없으니까, 휴대전화를 쓰는 데 이유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휴대전화가 없어도 연애에는 지장이 없다. 적어도 나는 항상 그랬다. 😀
`교수님들과 노동자들’이라는 말을 쓰시면서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으셨습니까? 정말 자연스럽게 나온 표현입니까? 아니면 괜히 과격한 인상을 남겨서 학우들의 배척을 받을까 봐 한쪽에 `님’을 붙이고 다른 한쪽에 `동지’를 빼어서 완화시킨 표현입니까? 어느 쪽이든, 정말 이분들을 모두 같이 연대할 대상으로 보았다면 한쪽에만 존칭을 쓸 수 있었을까요? 물론, 매주 몇 시간씩 강의실이나 연구실에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선생님들을 존경할 기회가 더 많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학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노동하시는 분 중에서 교직에 계시는 분들께 특별히 개인적으로 존경심이나 친근감을 더 느낀다고 해서, 그분들이 다른 일을 하시는 분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다는 통념에 동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더구나 혁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오히려 그 통념에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야 하지 않을까요?
2009년 11월 6일 금요일 구름 약간
인문대학+자연과학대학 4학년 /ti/ 드림
어차피 읽을 사람도 없을 테니까 안심하고 게시판에 붙였다. 하지만 나도 표현을 완화해 버렸네요 데헷☆
즐거운 것은 즐겁고 지겨운 것은 지겹다. 여기에는 달리 덧붙일 말도 없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즐거운 것은 옳고 지겨운 것은 그르다고 생각한 나머지 의무감을 가지고 발랄해지려고 한다. 신나는 것을 만들겠다고, 즐거운 집단이 되겠다고 진지하게 선언한다. 심지어 `엄숙함을 미처 버리지 못한 사람들’을 준엄하게 비판하는 일까지 있다. 그들은 재미없다는 말을 자신에 대한 공격이라고 느끼는 듯하다. 골치 아프게도, 발랄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그들에게 그대로 전달하기도 어렵다. 기껏 말을 해도 그들의 반응을 보면 “발랄함이라는 것은 반드시 추구해야 할 대의인데, 지금 너희는 거기에 미치지 못하고 있으므로 못난 사람들이다.” 정도 되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