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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인이기를 그만둔 이유가 아닌 것들

대략 만 열아홉 살 때까지 매사에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던 정통 개신교인 꼬꼬마가 어느 날부터 교회를 가지 않고, 몇 년 뒤에는 자기가 지키는 것의 두세 번째로 무신론을 꼽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런 사실을 평소에 블로그 밖에서까지 일부러 알리고 다닐 일은 잘 없지만, 길거리나 학내에서 개신교 포교자를 만나면 아주 가끔 낚시 의욕이 발동해서 업계 용어로 떡밥을 던져 볼 때가 있다.

“마음에 `갈급함’이 없어서요.”

상대편에서도 (카톨릭식 표현을 빌린 것이 송구스럽기 이를 데 없지만) 냉담자가 교회 문턱 한 번 안 밟아 본 사람보다 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니까 크고 아름다운 떡밥을 놓치지 않고 덥석 문다.

“교회 다니셨어요?”

“예.”

“지금은 안 나가세요?”

“예.”

“왜요?”

그래 봤자 묻는 게 묻는 게 아니다. `잃어 버린 양’을 주님의 품으로 도로 데려와야겠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형제·자매들은 벌써 답을 정해 놓고 있기 일쑤다.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라는 것이다. 그들은 일단 하나님을 보면 돌아올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그러면서도 사람의 문제를 무척 잘 파악하고 있다.

  1. 교회에서 개인적인 `상처’를 받아서.
    — 그런 거 없다. 오히려 당시에는 교회 사람들과의 관계가 순조로운지에 따라 교회 행사 참여도가 달라지는 사람들을 보고는 속으로 한심하다고 여기던 편이라서,  교회에서 나에게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을까 봐 걱정된다.
  2. 돈과 권력을 찬양하는 대형 교회의 주요 인사들 때문에.
    — `진보적인’, 심지어는 급진적인 교회도 있다. 후자는 서울 밖에서는 찾기 어려울 것 같지만.
  3. 학교에서 정치적인 세력에 미혹되어서.
    — 내가 학교 내에서 운동하시는 분들의 집단을 꺼린 이유가 교회와 똑같이 돌아가기 때문이었다. 특히 워십과 문선의 싱크로율은 쩐다. 재미있는 것은, 그래도 학생회 선배들이 어디 가자고 하면 마지못해서나마 따라가던 시기가 교회에 다니던 기간과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4. `세상의 초등 학문’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골로새서] 2장 8절.
    http://www.youversion.com/bible/korvb/col/2/8)) 때문에. 특히 인문대학에 다닌다고 하거나 적당한 중국 고전을 손에 들고 있으면 틀림없이 이쪽 루트다. ((물론 도킨스 책을 가지고 있으면 더 확실하겠지만, 나는 한 권도 읽어본 적이 없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쯤에서 나의 정답을 공개해야겠는데, 위에서 나온 비장한 예측이 무색해질 정도로 단순하고 사소해서 도무지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잘 없다. 1~4에서는 악역을 지목해서 같이 욕해주고 `그래도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셔요♡’로 마무리할 수 있지만, 여기에서는 구체적으로 나쁜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메롱. 😛 ((하지만 인간 악역이 없어도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셔요♡’는 할 수 있다. OTL))

신앙을 지속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아버려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생긴다고 생각했는데, 믿겠다는 의지가 나에게 있어서 믿는 것이라는 생각이 어쩌다가 들어버렸고 그것을 부정할 근거가 없었다. 끝.

신앙을 지속할 이유가 원래 있었다가 나중에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 그러니까 당연한 것일 때는 이유를 따져볼 필요조차 없었다.

[덧붙임 #1] 나는 기독교인이기를 그만두고 나서도 아래와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없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이런 것도 결국 기독교나 교회에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으니까 할 수 있는 말이다.

  • (어쩌다 바람직한 목사 한 사람을 보고) “저렇게 훌륭한 목사들만 있다면 나는 당장 교회에 다닐 텐데.”
  • “세상이 이렇게 지저분한 것을 보면 신은 없는 것이 분명해!”
  •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더 더러워.”
  • “예수야말로 사회주의를 실천한 혁명가야.”

또 개신교가 싫다는 이유로 다른 종교, 심지어 `이단’에 호감이나 동정심을 가지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나로서는 그것도 그다지 내키지 않는다. 다른 종교를 개신교를 기준으로 판단할 필요가 있는가?

[덧붙임 #2] 하지만 내가 다른 종교인보다 개신교인에게 더 거리를 두는 것은 사실이고, 그 이유는 본문의 1~2와 무관하다. 물론 착하고 리버럴한 개신교인이야말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겠지만.

무신론자에게는 어색한 말

신앙을 갖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부터 자연스럽게 안 쓰게 된 말이 몇 가지 있다.

  1.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아픔 없는 좋은 곳에서 편히 쉬시길.

물론 이런 인사를 한다고 해서, 꼭 인간보다 위에 있으면서 인간에게 좋은 것을 줄 수 있는 존재라든가 인간이 죽고 나서 갈 수 있는 더 좋은 세상이 있으리라고 진지하게 믿는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이 있다는 가정에 조금도 기대지 않아 보고 싶다. 특히 다른 이에게 희망을 준다거나 하는 `좋은 의도’로는 더욱 조심해야겠다.

  위의 인사말 대신 내가 쓰는 말은 좀 약해 보이지만, 내가 정확하게 동의하는 부분을 넘어선 것이 들어가 있지는 않다.

  1. `새해 복 쟁취하세요.’도 써 본 적이 있기는 한데, 상대가 하는 일을 구체적으로 언급해 주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2. 돌아가신 분과 더는 함께 있을 수 없어서 슬픕니다. 돌아가신 분을 기억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돌아가다’라는 표현도 산 사람이 사는 곳 이외의 세상의 존재를 함의(전제인가?)한다. 끙끙끙.)

덧붙임 #1. 몇 년 전에 다니던 학교의 학생회관 주변 곳곳에 이런 자보를 붙여 보았는데, 사람들은 1번까지 보고는 더 읽지 않고 고개를 흔들면서 지나가 버렸다. OTL

謹賀新年

학생회관에 서식하거나 출퇴근하거나 가끔 드나드는 모든 분께:
새해에는
1. 하시는 투쟁마다 승리하시고
2. 거시는 작업마다 성공하시고
3. 보시는 시험마다 합격하시고
4. 체력 관리와 체중 조절에 성공하시고
5. 질리거나 포기하는 일 없이 공부하시고
6. 단위마다 새로운 성원들을 많이 맞이하시고
7. 2층 카페테리아 반대편 끝에 있는 생활도서관을 많이 찾아 주시고
8. 연체된 책이나 비디오는 조속히 반납해 주시기 바랍니다.

生活圖書館 運營委員 一同 拜上

덧붙임 #2. 옛날에 보았던 만화 중에서 이 포스트에 넣고 싶은 것이 있어서 오랫동안 기억을 더듬어 가면서 겨우 찾았는데, 이 만화를 인용한 게시물을 보니 “도킨스 안 읽고 너드가 아니라도 무신론자가 될 수 있는데!” 라고 외치고 싶어졌다. ㅠㅠ

[WHAT ATHEISTS CRY OUT DURING SEX]
“OH, SCIENTIFIC METHOD!”
“MATH!”

© 2005 by Mark Stivers

Stivers-11-7-05-wrong-deity

http://www.democraticunderground.com/discuss/duboard.php?az=view_all&address=105×9010711

http://friendlyatheist.com/2007/10/17/friendly-atheist-contest-5-what-should-atheists-scream-out-in-bed/

같은 소재의 (그리고 위치는 반대인) 만화: Deist On Top by Jeff Swen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