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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ㅇㅈ을 위한 폭풍발췌.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끼. 죄와 벌. 초판. 홍대화 역. 서울: 열린책들, 2006.

제1부 4장 (102~104면)

그런데 라주미힌과 그는 어째서인지 마음이 통했다. 아니, 마음이 통했다기보다는 라스꼴리니꼬프가 그에게 좀 더 친밀하게 굴고, 솔직하게 대했다는 편이 옳았다. 그러나 라주미힌과 다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이 청년은 보기 드물게 쾌활하고 사교적이며, 단순할 정도로 착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이 단순함 뒤에는 깊이와 품위가 숨겨져 있었다. 그의 절친한 친구들은 이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그를 사랑했다. 그는 때로는 정말로 우둔하게 굴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상당히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는 풍채도 좋았고, 키가 크고 마른 데다가 검은 머리칼에 언제나 덥수룩한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는 난폭하게 행동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장사로 소문이 나 있었다. 한번은 밤에 동료들과 함께 놀다가 12베르쇼끄나 되는 경관을 한 방에 때려눕힌 적도 있었다. ((이 당시 사람의 키는 2아르신을 기본으로 계산하고 그 위에 남는 키를 베르쇼끄로 쟀다. 1베르쇼끄는 4.45센티미터이고 1아르신은 71.12센티미터이므로, 12베르쇼끄는 약 195센티미터이다.)) 그는 무한정 술을 마실 수도 있었으나,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을 수도 있었다. 때로는 도저히 용납이 안 될 정도로 못된 장난을 칠 때도 있었지만, 또 그런 짓을 전혀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라주미힌은 그 어떠한 실패에도 당황하지 않고, 그 어떤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훌륭했다. 그는 지붕만 얹혀 있는 집에서도 살 수 있었고, 지옥 같은 굶주림과 혹한도 참아 낼 수 있었다. 그는 지독하게 가난했지만, 여러 가지 일로 돈벌이를 해서 다부지게 혼자 힘으로 생활했다. 그에겐 퍼 올릴 수 있는 샘물, 즉 돈벌이의 방법이 무궁 무진했다. 어느 겨울 내내 그는 불 한번 때지 못하고 지낸 적도 있었는데, 그때도 그는 추우면 잠이 더 잘 오기 때문에 기분이 좋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지금은 그 또한 대학을 잠시 쉬고 있지만, 그것도 오랫동안 그럴 계획은 아니고, 학업을 계속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서둘러 상황을 호전시켜 가고 있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벌써 넉 달 동안이나 그의 집에 들른 적이 없었으며, 라주미힌 쪽에서는 그의 아파트 주소조차 모르는 형편이었다. 두 달쯤 전 그들은 거리에서 마주친 적이 있지만, 라스꼴리니꼬프가 먼저 얼굴을 돌리고, 알아채지 못하게 길 건너편으로 가 버리고 말았다. 라주미힌도 그를 알아보았지만, `친구’를 괴롭히기 싫어서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제2부 2장 (213면)

그[라스꼴리니꼬프]는 5층에 살고 있는 라주미힌에게로 올라갔다.

그는 집에 있었고, 좁은 방에 앉아 무언가를 쓰고 있다가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그들이 못 만난 지도 벌써 4개월이나 되었다. 라주미힌은 넝마가 다 되도록 낡은 실내복을 걸치고, 맨발에 실내화를 신고, 엉클어진 머리에 수염도 깎지 않고, 세수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그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제2부 5장 (271~272면)

그[루쥔]은 지나치게 격식을 차리고 위엄을 부리는 중년의 신사로서 조심스럽고 까다로워 보이는 외모를 하고 있었다. 그는 문에 멈추어 서서 무례할 정도로 놀라움을 감추지 않고서, 마치 `뭐 이런 데가 다 있어?’라고 묻기라도 하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리고 약간의 경악과 모욕감에서 오는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그는 라스꼴리니꼬프의 비좁고 낮은 `선실’을 둘러보았다. 이어서 그는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놀란 표정으로 시선을 돌려, 옷도 안 입고, 헝클어진 머리에 씻지도 않은 채 초라하고 더러운 소파에 누워서, 역시 미동도 하지 않고 자기를 관찰하고 있는 라스꼴리니꼬프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 역시 그 느릿한 동작으로 너절한 옷에 수염도 깎지 않고 머리도 빗지 않은 라주미힌의 몰골을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라주미힌 또한 그 시선을 맞받아서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은 채, 오만불손하고 의문이 가득한 눈동자로 그를 직시했다. 긴장된 침묵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이런 경우에는 항상 기대할 수 있는 일이지만, 마침내 분위기에 약간의 변화가 일어났다. 새로 들어온 신사가 약간의 징조, 하지만 충분히 뚜렷한 징조를 보고 이곳, 이 `선실’과도 같은 방에서는 엄격하게 과장된 당당한 태도를 취해 봐야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고 판단했는지 약간은 태도를 누그러뜨린 것이다. 그는 정중하게, 그러나 준엄한 태도를 버리지 않고서, 조시모프를 향해 음절을 딱딱 잘라 발음하면서 질문했다.

“당신이 로지온 로마노비치 라스꼴리니꼬프, 대학생, 아니 대학생이셨던 분입니까?”

조시모프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 답하려 했으나, 질문을 당하지도 않은 라주미힌이 불쑥 그를 앞질러 대답했다.

“저기 소파에 누워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무슨 일이시지요?”

이 `무슨 일이시지요?’라는 무람없는 말투가 격식을 따지는 신사를 꼼짝못하게 했다. 그는 하마터면 라주미힌에게로 몸을 돌릴 뻔했으나, 가까스로 제때에 자기 자신을 제어하고, 다시 조시모프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제2부 5장 (275면)

라주미힌은 계속 말했다. 그의 이러한 친근한 태도에서는 진정으로 꾸밈이 없는 선량함이 드러났기 때문에, 뾰뜨르 뻬뜨로비치는 잠시 생각한 뒤 용기를 내었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이 비렁뱅이에다가 철면피 같은 사람이 적절한 시기에 자기 자신을 대학생이라고 소개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제3부 1장 (377~378면)

이런 말을 나누면서 그들은 여주인의 아파트 문 바로 앞의 계단참에 서 있었다. 나스따시야는 몇 계단 아래에서 그들에게 빛을 비춰 주고 있었다. 라주미힌은 평상시와는 달리 매우 흥분해 있었다. 라스꼴리니꼬프를 집에 바래다 주던 30분 전만 하더라도 라주미힌은, 자기도 인정했다시피, 지나치게 말을 많이 하긴 했지만, 그날 저녁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신 것에 비하면 정신도 거의 말짱하고 원기도 대단히 왕성한 편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묘한 기쁨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여태까지 마신 술의 취기가 두 배로 한꺼번에 그의 머리로 몰려들었다. 그는 두 여인 옆에 서서 그들의 손을 꼭 부여잡고 설득을 하며, 더 확신을 시키고 싶었는지 놀랄 정도로 솔직하게 이유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마치 압착기로 쥐어짜듯이 두 사람의 손을 아프게 꽉 붙잡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쑥스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아브도찌야 로마노브나를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두 여인은 손이 너무 아파서 뼈마디가 울퉁불퉁하고 큼직한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보려고 했지만, 그는 그것을 알아채지도 못했을 뿐더러, 웬일인지 손을 더욱 세차게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만일 그들이 지금 당장 머리를 박고 계단에서 떨어지라고 지시했다면, 그는 아무 생각도 없이,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고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 아들 로쟈에 대한 걱정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던 뿔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마저도 젊은이가 너무 유난스럽게 행동하고, 또 손을 너무 아프게 쥔다고 느낄 정도였다. 그렇지만 그녀에게 그는 구세주나 다름없었으므로, 그녀는 그의 온갖 괴팍한 행동거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브도찌야 로마노브나는 잘 놀라지 않는 성격인 데다가 걱정거리가 많았는데도, 자기를 쳐다보는 오빠 친구의 야수와 같이 이글거리는 시선에 놀란 나머지 기겁을 할 정도였다. 다만 나스따시야의 이야기 덕분에 품게 된 이 기괴한 사나이에 대한 무한한 신뢰감이, 그녀로 하여금 어머니를 당장 끌어당겨 그곳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유혹을 억누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녀는 또 지금 그에게서 도망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10분 정도가 지나자, 그녀의 마음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라주미힌은 자기의 기분이 어떻든 상관없이, 자신을 금방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었으므로, 그를 마주 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곧 알아차렸다.

제3부 4장 (399~401면)

`과연 그렇게 창피스럽고 우스꽝스러운 비교가 가능한 일일까?’

라주미힌은 이런 생각이 들자 절망에 빠져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마치 공교롭게도 바로 그 순간, 여주인이 아브도찌야 로마노브나를 질투할 거라고 어제 계단에서 그들에게 떠들어댔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는 부끄러워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팔을 힘껏 휘둘러 주먹으로 부엌의 벽난로를 내리쳤다. 그의 손은 상처를 입었고, 벽돌 하나가 부서졌다.

`물론…….’

그는 잠시 후 혼자 중얼거렸다.

`물론, 어떤 종류의 자기 비하로도 그 비열한 언사를 그럴듯하게 씻어 감출 수는 없을 거야……. 그러니 이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그냥 말없이 나타나서……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는 거다……. 역시 묵묵히 말이다……. 그리고 용서를 구하지도 말자. 아무 말도 하지 말자. 그리고…… 그리고, 물론, 모든 일은 이미 끝장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옷을 입으면서 평소보다 더 신경을 썼다. 그에게 다른 옷이라곤 없었다. 그러나 다른 옷이 있었다 한들 그는 그 옷으로 갈아입지 않았을 것이다.

`일부러라도 안 입었을 거야.’

그렇다고 지저분하게, 아무렇게나 하고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할 권리가 그에게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그들이 그를 필요로 해서 먼저 와주십사고 부탁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의 셔츠는 항상 깔끔했다. 이것만큼은 그도 특별히 신경을 쓰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아침 그는 아주 세심하게 세수를 했다. 나스따시야의 방에서 비누를 찾아서 머리와 목, 특히 손을 깨끗이 닦았다. 뺨에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을 깎을까 말까 망설이다가(쁘라스꼬비야 빠블로브나는 남편 자리니쯔인이 고인이 된 이후에도 훌륭한 면도날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단념해 버렸다.

`그냥 내버려두자! 내가 혹시라도…… 그래서 수염을 깎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반드시 그렇게 생각할 거야!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돼! 그리고……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내가 너무 거칠고 지저분하고, 술꾼 냄새를 풍긴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리고 내가 스스로를 조금이나마 점잖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해도…… 점잖다는 것이 또 뭐 그리 자랑거리가 되겠는가? 누구나 점잖아야 하고 깨끗해야 한다. 또…… 어쨌든(그는 이 점을 상기했다) 그에게 이런 일들이 생겼으니…… 파렴치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래도……! 어쩌다가 그런 엉뚱한 생각들이 떠올랐단 말인가! 음…… 아브도찌아 로마노브나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하다니! 제기랄! 그냥 내버려두자! 일부러라도 지저분하고 기름때 낀 모습으로 거칠게 굴자. 상관없어! 더 그렇게 굴자……!

덧붙임_처음에 책을 들고 아무 곳이나 펴자마자 나온 부분이 하필이면 여기였다:

난 마음속으로 혹 요즘에 유행하는 무신론이 네 가슴에 자리잡았을까 봐 두렵구나. 만일 그렇다면 내가 너를 위해서 기도하마.

무신론이 유행이라도 하면 좋겠다. 😀 어쨌든 아들이 무신론자가 되었을까 봐 두려워하면서 기도를 하겠다는 어머니를 보니 작년의 패륜-_-이 생각난다.

母: 엄마가 지금 기도해 줄게.

T: 저한테 종교 행위 하지 마세요.

저 말이 척수 반사로 튀어나와서 대뇌에서 깜놀. 이런 자식입니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