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문대학 어느학과

개인적으로 배척하는 개그 패턴이 두 가지 있다.

  1. 자기비하: 몸으로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으면서 말로만 자기를 비하하는 것.
  2. 동음이의어: 발음의 유사성만 가지고 단어를 바꾸어 쓰는 것.

주변 사람들이 저런 식의 개그를 시도할 때마다 적극적으로 규탄해 온 나로서는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차마 `입문대학 어느학과’라는 말을 꺼내거나 포스팅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저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이야기해볼 만하다.

  1. 어느학과 (2006년 봄)
    1학년생들을 대상으로 한 첫 전공과목의 첫 시간에 선생님께서 해 주신 말이 있다. “누가 과를 물어볼 때 언어학과라고 대답하면, 사람들이 언어학과가 있는 줄 잘 모르니까 `어느 학과’라고 반문했다고 오해할 때가 있었어요.”
  2. 입문대학 (2009년 봄)
    아마 기말고사 기간이었을 것이다. 모처럼 배달 음식을 시켰다. 학내 지리에 밝은 주변 음식점으로 전화를 걸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몇 번씩이나 배달 위치를 다시 말해 달라고 요청하기에, 딱히 못 알아들을 말도 없는데 왜 그럴까 하면서 계속 인문대학[임문대학]이라고 알려 주었다. 이런 일은 처음 겪어 보아서 음식이 제대로 올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배달원은 익숙하게 찾아왔다. 밥을 다 먹고 친구와 돈을 나누려고 영수증을 보니까, 배달 장소가 **대학교 입문대학이라고 적혀 있었다. 뭐, 조음 위치 동화가 표준 발음은 아니니까 [임문대학]으로 오해를 산 것도 내 탓이기는 하다 OTL

언어학과가 존재감이 없다는 사실은 당연할 정도이지만, 인문대학까지 듣보잡이라니 흠좀무.

이름음소점

점이라는 것은 이렇게 터무니없다니까요.

  • 공명음으로만 된 이름을 가진 윤미래 씨는, 성격이 온화하고 다른 사람들과 잘 화합하는 사람입니다. 다만, 너무 온순한 성격 때문에 눈에 띄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안타깝습니다. 자기 의견을 좀 더 적극적으로 개진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 박준형 씨의 이름에서는 자음 음소가 조음 위치 및 조음 방식별로 골고루 분포할 뿐만 아니라 모음에서도 높이와 원순성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방면에 재능을 보이면서 다이내믹한 생활을 즐깁니다. 한 가지에 꾸준하게 몰두하지 못하는 점만 극복한다면 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겠지요.
  • 이휘소 씨의 이름을 발음할 때에는 기류가 막히는 일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한 번 마음먹은 일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진행할 수 있는, 강인한 추진력의 소유자입니다. (이하 생략)

하지만 한국어에서는 한글 표기만으로도 음소를 쉽게 뽑아낼 수 있으니까, 대략 아래와 같은 정도로만 설정해도 그럴 듯하게 프로그램을 짤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실제로 만들거나 믿으면 곤란합니다. 하지만 조음음성학 초급 연습문제로는 괜찮지 않을까요? 🙂

[주요 파라미터]

  • 자음: 조음 위치, 조음 방식, 공명도, 기식성
  • 모음: 높이, 위치, 원순성
  • 음절: 초성 존재 여부, 종성 존재 여부
  • 파라미터 분포의 통일성/다양성

언어학 3종 세트

R: 안녕하세요. 오늘은 /ti/씨가 만든 언어학 아이템 3종 세트를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ti/씨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죠.

T: 네. 티셔츠에 찍을 도안을 구상해 놓기만 하고 몇 달 동안 벼르고만 있던 것들을, 드디어 완성된 물건으로 만들어 내었습니다.

R: 왜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렸나요?

T: 처음에는 도안을 전사 용지에 잉크젯 프린터로 인쇄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하니까 인쇄된 부분이 뻣뻣해져서 넓은 면을 찍을 수가 없겠더라고요. 또 제가 집에 다리미가 없어서, 친구들 다리미를 빌려서 쓰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고요. 그래서 다른 방식을 찾다 보니 몇 달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R: 그러면 오늘 소개할 가방과 티셔츠의 도안은 무슨 방식으로 찍은 건가요?

T: 인터넷에서 검색하다가 티셔츠 스텐실을 쉽게 설명해 놓은 블로그 포스트( http://sugarcube.textcube.com/79 )를 발견해서 참조했습니다. 방금 연결한 포스트에서는 OHP 필름을 사용했지만, 저는 귀찮아서 A4 용지를 그대로 잘라서 썼어요.

R: 그렇군요. 이제 결과물을 하나씩 보도록 할까요?

T: 예. 첫 번째는 사순흡착음 에코백입니다.

R: 앗, 그 일 년 묵은 도안 말이군요?

T: 윽, 아픈 곳을 찌르시다니…… 어쨌든 그 도안이 맞습니다. 아래를 보아 주세요.

4lab_bag_1

R: 오. 요즘 에코백이 유행이죠.

T: 네, 여름계절학기가 끝나자마자 동대문종합시장에서 캔버스천을 떠 와서 직접 손으로 만들었습니다. 가내수공업이에요.

R: 고생하셨군요. 그런데 이거 튼튼한가요?

T: 음…… 집에서 시험해 봤는데 대략 3킬로그램 정도는 넣을 만하더군요.

R: 그러면 노트북과 책을 동시에 넣을 수는 없잖아요.

T: 그그그그그렇죠. 죄송합니다.

R: 그리고 다음은요?

T: 음운론의 최적성 이론 중에서 매카시의 Sympathy Theory—한국어 번역어를 몰라서 죄송합니다—를 따 왔습니다. 나머지 두 점과는 달리 단순하게 만들어 보았어요.

sympa_1

R: 원래 도안에는 Sympathetic Candidate를 상징하는 꽃을 든 소녀가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T: 흠흠, 그 그림은 스텐실로 찍어 내기에는 좀 복잡해서…… 윤곽선을 따라 오려서 열전사를 시도해 볼 수는 있겠네요. 어쨌든 이 3종 세트를 받는 대학원생이 제일 관심을 보였던 것은 다음 티셔츠입니다. 이 도안은 스텐실로 찍는 대신에 옷감에 사용할 수 있는 펜으로 직접 그렸습니다. 앞서 소개한 티셔츠는 [최적성 이론]을 사용했으니까 여기에서는 [SPE; Sound Pattern of English (Chomsky and Halle 1968)]에서 소재를 따 왔죠. 나름대로 생성음운론 내에서 이론들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고 했어요. 특히 (적어도 2009년 1학기에 언어학과 학부 4학년 과목 [언어학연습 I]에서 배운 대로는) 최적성 이론이 아직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불투명성(opacity)을 강조했습니다.

counterfeed_1

R: ……이것은 너드를 배격하자는 /ti/씨의 평소 주장과는 상반되는 것 같은데요.

T: 받는 사람이 워낙에 너드라서…… 일단 산뜻한 분홍색을 바탕으로 해서 nerdity를 완화했고요. 도안 자체는 논문을 치우고 술을 먹자는 내용입니다.

R: 변명 같지 않은 변명이지만 넘어가기로 하고요. 도안 설명이 더 필요한 것 같은데요.

T: 예. 우선 첫 번째 줄의 UR, 그러니까 기저형 제일 앞에 논문이 하나 있고, 바로 뒤에는 대학원생 하나, 그 뒤에는 책이 한 무더기로 있죠? 여기에 적용될 수 있는 규칙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1번의 칵테일 삽입 규칙. 저 대학원생 앞에 아무것도 없으면 그 빈자리에 칵테일 한 잔을 넣으라는 뜻입니다. 2번의 논문 삭제 규칙은, 제일 앞에 논문이 있으면 무조건 없애라는 규칙입니다. 이 도안을 대학원생들에게 보여주니까 다들 논문 삭제 규칙을 매우 좋아하더군요.

R: ……

T: 이제 이 두 가지 규칙을 처음에 제시한 기저형에 적용해 보죠. 칵테일 삽입 규칙을 먼저 적용하게 되어 있죠? 그런데 지금 상태로는 이 대학원생 앞이 빈자리가 아니니까 칵테일을 삽입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규칙을 적용하지 못한 채 다음 규칙으로 가야 하죠. 논문 삭제 규칙에서는 논문이 제일 앞에 있을 때 지우게 되어 있으니까, 이 기저형에서 논문을 지울 수 있겠네요. 두 가지 규칙을 모두 거쳤습니다. 그런데 결국 칵테일을 삽입하지 못했잖아요? 만약 두 규칙의 순서가 바뀌었더라면, 논문을 지우고 생긴 빈자리에 칵테일을 삽입할 수 있었겠죠. 다시 말해서, 논문 삭제 규칙이 적용된 결과로서 칵테일 삽입 규칙이 적용될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진다는 겁니다. 이 경우에, 티셔츠에 제시된 순서하에서 논문 삭제 규칙이 칵테일 삽입 규칙을 반급여한다(counterfeed)고 합니다.

R: 그러니까 마지막의 `반급여하지 마!’는 논문은 쓰기 싫고 술은 먹고 싶다는 주인공의 심정을 절실히 표현하는 말이로군요.

T: 바로 그거죠. 그런데 이 3종 세트를 받을 대학원생은 반드시 이 티셔츠를 입고 선생님께 가겠다고 벼르고 있답니다.

R: 용자로군요.

T: 사실 선생님의 반응이 궁금하잖아요.

R: 그 뒷이야기는 다음에 듣도록 하고…… /ti/씨의 언어학 아이템 3종 세트 소개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ti/씨 수고하셨고요, 다음 도안도 기대할게요.

T: 예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