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가는 대로

기말 논문 제출일이 며칠 남지 않고 보니 평소에 혼자 놀던 것까지 녹음해서 블로그에 올리게 된다.

2009년 12월 22일, YAMAHA PSR-275로 연주, Goldwave로 녹음

1. 정윤경 작사·작곡, “시대” (1999)
http://frozenfiremeidi.net/mus/20091222_sidae.mp3

2. 초희 작사·작곡, “새” (2006)
http://frozenfiremeidi.net/mus/20091222_sae.mp3

사람들은 저 새들을 원하는 대로 바라본다
자유롭다 평화롭다 순수하다 슬기롭다
온갖 아름다운 말로 새들을  찬양하지만
인간의 눈을  가지고 그렇게 보고 싶을 뿐

반짝이는 두 날개와 귀여운 울음소리뿐
사람들은 저 새들에게서 갖고 싶은 것만 취한다
새들의 눈을 보지 않고 목소리도 듣지 않고
새들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도 만들지 않는다

[덧붙임 #1] 이제는 다치거나 죽어도 영예는커녕 “죽은 놈만 ㅂㅅ”이 되는 것 같다.

[덧붙임 #2] 초희의 블로그 2005년 12월 30일 포스트 “인간, 남성, 어른” 복원

인간, 남성, 어른

‘아이들이 희망이다’는 식의 말은 몹시 불편하다. 어른들이 망쳐 놓은 더러운 세상을 아이들의 깨끗함으로 치유하려는 것 같고, 어른의 무기력함을 아이에게서 보상받으려는 듯하다. 그런 주제에 아이를 계도하려는 어른의 역할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아이에게서도 배우는 어른의 겸손함을 더 부각할 뿐이다. 그저 어른이 하고 싶었던 말을 아이의 입에서 나왔다는 순수함으로 장식하는 것 아닌가?

인간이 보는 자연이나, 남성이 보는 여성이나, 어른이 보는 아이나 그 이미지는 비슷하다: 부드럽고 유약하다. 지성이 부족하지만 때때로 본능적이고 신비로운 지혜를 발휘할 때도 있다. 그러면서도 한 번 화가 나면 ‘우리’ 인간·남성·어른보다 무서워진다. 어쨌든 우리가 보호해야 할 대상이지만 국익이나 경제 발전을 위해서라면 제일 먼저 희생되어야 한다.

나름대로 자연을 사랑하고 성차별에 반대한다는 아저씨(혹은 아줌마)들이 오히려 아이들에게 저런 이미지를 즐겨 그린다. 하긴 어디 종, 젠더, 나이에서만 그럴까? 각각 상세하게 들어가자면 차이가 있겠지만 서구/비서구, 도시/시골, 비장애인/장애인 등에서도 저런 식의 이미지가 나타나니 말이다. 하여튼 ‘그들’―이라고 부르면서 자연스럽게 ‘우리’와 구분하고 있지요―에게서 배워야 하는 것은 맞는데, 그들이 직접 말하게 해야 한다. 맨날 차별하다가 자기들이 각박하고 황폐해지면 그들을 차별한 장본인인 자기네들을 구원해 줄 존재로 추켜올리고, 그들의 도덕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계속 차별받을 것을 요구하는 것은 우선 지겹고, 또 찔리지도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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