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여름에 브라질 음악을 찾아서 듣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포르투갈 어 발음을 대략 훑고 나서 문장을 해독하려고 사전을 펼쳐 보기 시작할 때이기도 하다. 그때 처음 `꽂힌’ 곡이 노부스 바이아누스(Novos Baianos; 바이아 청년들)의 [내 고향의 삼바(O Samba da Minha Terra)]였다. 노래와 연주가 워낙 신나는 데다가 뜻밖에 가사도 쉽게 해석되어서, 원곡을 작곡한 도리바우 카이미(Dorival Caymmi)가 지은 곡들을 더 찾아보았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다음 노래가 [마라캉갈랴](Maracangalha; 연결된 동영상에서는 2:12부터)였다. 가사는 더 짧고 단순했다. `나 이러다가 포르투갈 어를 너무 빨리 익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근자감에 빠지기 직전, 다행히 후렴구의 문장 덕분에 현실로 돌아왔다.
Se Anália não quiser ir, eu vou só. 아날리아가 가기 싫어하면 나 혼자라도 갈 테야.
문장을 한국어로 옮기기는 어렵지 않은데 `quiser’의 정체가 문제였다. `바라다’라는 뜻인 `querer’의 활용인 듯하지만, 도무지 본 적이 없는 형태였다. 영어나 프랑스 어에서 배웠던 내용에서 유추하자면, 저렇게 생긴 가정문의 조건절에서 동사의 활용은 직설법 현재시제가 될 것 같았다. 하지만 `quiser’가 삼인칭 단수 주어의 직설법 현재시제 활용형처럼 생기지는 않았다. 사전을 뒤져보니 접속법 미래시제라고 한다. 접속법도 알고 미래시제도 알지만, 그 둘이 결합한 것은 처음 보았다. 좀 의아하기는 했지만 당장 문법을 공부할 생각은 없었고 일단 노래를 따라 부르기에 급급해서 곧 잊었다.
그러고 꼬박 한 해가 지났다. 작년에 사서 묵혀 둔 포르투갈어 문법책을 인제야 제대로 읽기 시작했다.1 처음 절반까지는 쉽게 넘어갔다. 그러다가 동사의 부정형(不定形)이 수와 인칭에 따라 변화한다는 대목에서 비명을 지르고, 접속법 과거완료가 `조동사+과거분사’ 복합형 이외에도 별도의 단순활용형이 있다는 부분에서 목이 메다가, 접속법 미래시제를 보고는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뜯었다. 고작 이틀 전에, 여름계절학기 [[스페인어입문 2]] 에서 “접속법은 기본적으로 현재 일어나지 않는 상황을 표현하는 것이니까 미래시제가 따로 필요 없지요.” 하는 말을 들으면서 당연하다는 듯 끄덕거리고 있었단 말이다.
어쨌든 일 년 전의 `quiser’가 곧 떠올라서 간신히 인정했지만, 도저히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고작 프랑스 어와 카스티야 어만 본 주제에, 적어도 로망스 어에 관한 한 아래와 같은 형식이 가슴속에 단단히 박혀 버린 탓이다. 마침 영어의 가정문과 맞아떨어지기도 하고.
- 단순히 조건과 결과를 서술하는 경우 (예: `내일 날씨가 맑으면 소풍 가야지.’)
조건절: 직설법 현재시제 / 주절: 직설법 미래시제- 현재 사실에 반대되는 내용을 가정하는 경우 (예: `지금 쟤만 안 왔으면 분위기가 딱 좋았는데.’)
조건절: 접속법 과거시제 불완료상 / 주절: 조건법(=가능법=과거미래)- 과거 사실에 반대되는 내용을 가정하는 경우 (예: `일찍 도착했으면 술을 마실 수 있었는데.’)
조건절: 접속법 과거시제 완료상 / 주절: 조건법 완료상
그런데 포르투갈 어에서는 `1. 단순히 조건과 결과를 서술하는 경우’의 조건절에 접속법 미래시제를 쓴다. `오오 조건절의 동사를 접속법으로 통일하다니 근성 있다!’ 하고 감동하는 동시에2 `아무리 그래도 접속법에다 미래시제라니! 접속법에다 미래시제라니!’ 하면서 거부감이 들고, 여러모로 복잡한 기분이었다.
이튿날, 그러니까 오늘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도 계속 신경이 쓰였다. 다른 로망스 어에서는 더는 쓰이지 않는 것이3 포르투갈 어에만 남아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 다른 어파에서는 어떨지 궁금해진다. 그러다가 2008년 2학기 [[인구어학]] 수업에서, 현재 사용되는 인도유럽 어 중에서 법(法;mood)이 제일 세분화된 언어는 러시아 어라고 배웠던 것이 기억났다. 그렇다면 법마다 시제나 상이 좀더 풍부하게 있지 않을까? 마침 아는 노어노문학과 대학원생도 있겠다, 당장 물어보아야겠…… 아차, 지금 새벽 5시 30분이었지. 두 시간을 꾹꾹 참다가 문자를 보냈다. 나중에 온 긴 답문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없다는 것이고, 좀 더 설명하자면 러시아 어에는 애초에 미래시제가 없고 과거/비과거의 구분만 있다는 것이다. `1. 단순히 조건과 결과를 서술하는 경우’의 조건절에는 물론 직설법 현재시제, 여기까지는 좋은데 특이하게도 완료상을 쓴다.
어쨌든 러시아 어에도 접속법 미래시제가 없다고 하니까, 학교 안팎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현대어 중에서 접속법 미래시제형을 가진 언어는 포르투갈어가 거의 유일한 듯하다. 애초에 달라질 상황도 없었지만, 이야기를 하고 나니 마음이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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