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복수전공을 할 생각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굳이 주전공과 복수전공을 구분할 것도 없이, 언어학과 수학을 전공하려고 했다. 그래서 복수전공 신청 요건인 4개 학기 이수 전부터 그 결심을 주변 사람들에게 거리낌 없이 알렸다. 그런데 막상 복수전공을 시작하고 나서는, 오히려 그 사실을 될 수 있는 대로 숨기게 되었다. 대화의 선택지가 시뮬레이션 게임보다도 적은 데에 질려서다.
수리과학부 복수전공이 영어영문학과나 심리학과, 경제학부 등의 복수전공과는 전혀 다른 것인 양 특이하게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별것도 아닌 일로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가 했는데, 그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수리과학부 복수전공을 한다고 했을 때 그 사람들이 머릿속에 그리는 인상은 대략 이런 것들이었던 듯하다: 수학에 대한 애정이 넘친다거나, 대학은 인문대로 왔지만 고등학교 때 이과과정을 이수했다거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수리과학부 전공 수업을 들어도 충분히 학점을 잘 받을 수 있다는 자신이 있어서겠지.
어익후. 이런 사람이 있다면 나도 칭송하기를 마다하지 않겠는데, 도대체 누구 이야기냐. 나의 실제에 하나도 들어맞지 않는 말을 그대로 듣고만 있을 수도 없어서, 일일이 정정해 준다. 나는 수학 전공자들이 자기 전공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 조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고등학교 때는 공통수학만 했던 예체능계였고 지금 다니는 대학의 1학년 1학기 때 처음으로 치환 적분을 배웠다, 그리고 수리과학부 전공과목들이 전체 평점을 1점씩 깎아 먹고 있다 등.
그런데 그렇게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 사람들은 다음에 똑같은 이야기를 또 한다. 수학에 대한 너의 열정이 어쩌고저쩌고, 너는 수학을 좋아하니까 등. 저 사람들이 내가 자기들에게 작업이라도 걸까 봐 무서워서 일부러 나의 비호감을 사려고 저런 소리를 한다고 믿는 쪽이 차라리 기분이 덜 나쁘다.
조금 다른 대화 패턴도 있다. 저쪽에서 이런 말을 꺼낸다: 좋겠어요, 하고 싶은 복수전공도 하고. 나로서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당연하다: 아무개 씨도 자기가 하고 싶은 것 하면 되잖아요. 상대는 한숨인지 코웃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면서 말한다: 저는 그렇게까지 여유가 없어서요.
오프라인에도 심심이가 많은지, 위와 같은 내용의 대화를 여러 곳에서 반복하게 되었다. 서로 알고 지낼 것 같지도 않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여유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놀랐다. 긍정적 생각을 또 발동한다. 당신은 여유로워서 그럴 수 있다는 말을 그렇게 확연히 빈정대는 투로 내뱉는 것은,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는 좀처럼 하기 어려울 터이다. 어차피 몇 살 차이도 나지 않았지만, 그 사람들에게는 내가 연장자로 보이지 않았나 보다. 그것 하나는 진심으로 기쁜 일이다. 나보다 어린 누군가가 단순히 나이 때문에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을—그다지 적절한 말은 아니라고 하더라도—다 하지 못하는 상황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그 사람들도 나중에 다들 자기 단과대학 내에서 복수전공을 시작했다. 아니, 복수전공은 배부른 인간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말해 놓고는. 어쨌든 복수전공을 한 이상 8학기 졸업은 힘들 테니까, 그 여유라는 것이 돈이나 시간 문제는 아니었나 보네요. 그럼 도대체 그 여유의 정체가 뭔가요?
사실 이미 어느 정도 답이 있다. 저 대화 패턴에 참여했던 사람 중 한 명이 그 직후에 다른 말을 덧붙였다: 잘 모르는 분야에 들어갔다가 삽질하는 것이 ( ). 뒷부분을 빈칸으로 둔 이유는 저 자리에 들어간 말을 기억할 수 없어서이다. 그냥 말끝을 흐렸던 것 같기도 하고. 확실한 것은, 긍정적인 말이 들어가지는 않았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간지난다고 생각한다면, 분명히 잘 나가는 결과만을 떠올려서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남i이 자신i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을 볼 때도 당연히 그 사람i이 잘 나갈 자신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라고 넘겨짚게 된다. 그런데 저는 아니거든요. 하고 싶은 것에 손을 대었는데 잘되지 않는다고 해서, 현시창이라고 하지는 않거든요. 잘할 자신이 있는 일만 시도한다면, 이 세상에 내가 감히 해 볼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느냔 말이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의 이번 학기 학점이 4점대라면 아무래도 신빙성이 떨어질 것이다. 반대로 평균평점이 3점대를 못 넘긴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 자기합리화가 된다.

Comments 1
무섭다. 두렵다. …??
Posted 27 Oct 2009 at 00:23 ¶아마도 세상 사람들은, 나를 포함해서, 생각을 그리 깊게 하면서 살진 않는 모양이군.
any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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