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엽전으로 만드는 말들

1학기 초라면 2학년생들이 한창 새내기들을 데리고 열을 올릴 때이다. 모두 모여서 점심에 후식까지 배부르게 먹고 나면 두 시 반 무렵이 된다. 아직 추운 초봄이지만 그나마 조금은 따뜻해져서 움직이기 좋을 시간이다. 마침, 몸을 풀 만한 놀이도 있다. 원칙적으로야 말소리가 필요 없지만, 하다 보면 몸보다 목청이 더 풀리는 놀이이다. 이 놀이의 인기가 학교 전체로 보자면 퍽 시들었다고는 해도, 대략 두 단과대학에서는 여전히 그 놀이를 활발하게 즐긴다고 한다. 그 중 한 단대 내에서도 특히 잘 논다는 학과 학생들이 주로 모여서 그 놀이를 하는 통로가 있다. 게다가 그 통로는 그 학과 학생들이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목이다.

그 통로 바로 옆 건물 1층에서 정확히 두 시 반에, 바로 그 학과의 전공필수과목 수업이 있었다. 갓 부임한 서유럽 출신 교수가 때로는 창문 밖에 대고, 때로는 직접 나가서 조용히 해 달라고 요청했다. 다들 영어를 잘 알아들어서 곧 소음이 잦아든다. 하지만, 다음 주가 되면 다시 시끄러워진다. 3월 내내 이런 상황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교수가 수강생들에게 이 문제로 한마디 했는데, 수강생 두 명이 어이없는 대답을 했다.

교수: 어째서 저 친구들은 여기서 수업을 하는 줄 알면서도 저렇게 시끄럽게 떠들고 놀까요?

학생 1: 그게 `코리안 스타일’이에요.

교수: 그게 지금 여러분 나라에서 일반적인 일이라고 해도, 여러분이 앞으로라도 자기 나라를 더 좋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학생 2: 오히려 10년 전에는 안 그랬어요. (다른 학생들 웃음)

교수: 그러면 더 나빠지고 있단 말이에요?

[물론 이 대화는 모두 영어였지만, 내가 맞게 알아들었다고 치자. ;-) ]

나는 첫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다: 그 이유는, 수업이나 연구에 방해를 주지 않고 편히 놀 만한 공터가 없어서입니다. 만약 있다면, 학교에서 당장 그 자리에 건물을 세웠겠지요. 지난 몇 년 동안 이 학교에서 새로 생긴 건물 상당수가 그런 공터나 운동장을 밀어버리고 들어선 것이고요. 학교는 기존 건물에 있던 학생 자치 공간도 줄이거나 없애지 못해서 안달이에요. 이 수업 시간 동안 밖에서 노는 저 친구들 말고도 옆 복도에서 떠드는 친구들도 많지 않습니까? 갈 만한 곳이 있다면 벌써 거기로 이동했을 텐데 갈 곳이 없으니까 그러는 겁니다. 저 친구들에게 배려심이 좀 더 있으면 좋겠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동시에 저 친구들이 학교에 자기들을 위한 공간을 확보해 달라고 직접 요구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요. 선생님께서도 저 친구들이 모여서 노는 것 자체를 문제로 삼으시지는 않으셨잖아요.

이 말을 영어로 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좌절하다가 `코리안 스타일’이라는 말을 듣고 절망해 버렸다. 누구 마음대로 이 문제를 나라 문제로, 세대 문제로 만드는 겁니까. 학생 1님, 정말 다른 나라 대학에 가 보셨나요. 학생 2님, 10년 전에도 대학에 다니고 계셨나요(학생 1님은 20년 전에 다녔을 것 같지만). 무엇보다도, 한국인 교수에게도 과연 그렇게 대답하셨을까요.

어쨌든 얼마 후 그 학과를 거명해가며 그 놀이를 자제해 달라는 게시물이 학교 비공식 커뮤니티에 올라와서 베스트게시물이 되었다고 한다. 들어가서 읽어 보았더니 이 수업 수강생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덧글이 눈에 띄었다. 굵은 글씨 강조는 내가 했다.

오늘 ***(과목 이름) 시험 보는데도 ###(놀이 이름);;;
아 물론 예전부터 *** 시간에는 거의 매 시간 ### 했지만;;
게다가 외국인 교수님이 하시는 강의인데
한국 전체에 대한 인상도 고려해주시는 것이 좋겠어요 제발.

두 달도 더 된 일이지만 역시 지금 다시 읽어도 무섭다.

한국에 대한 그 교수의 인상에 영향을 줄 만한 것이 있다면, 오히려 놀이 하나에 `코리안 스타일’ 운운하면서 스스로 엽전이 되는 것이나 자기보다 몇 살 어린 후배들을 `우리 때는 안 그랬다.’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까고 보는 것이라는데 한 표를 주겠다. 애초에 그 교수가 한국 전체에 대해 어떤 인상을 받을지를 우리가 걱정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덧붙임 #1

아무래도 그 교수의 성이 영어 이외의 유럽 어라서인지, 성명을 잘 외우지 못하고 그저 `외국인 교수’라고만 지칭하는 학생들이 많다. 그분이 한국에 대해 가지실 인상까지 신경 쓰는 친구들은 어떨지 살짝 궁금해진다. :-P

덧붙임 #2

앞으로 비슷한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해서 영어로 말하는 연습을 열심히 해야겠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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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Responses to “자기를 엽전으로 만드는 말들”

  1. rata says:

    멋져요 /ti/님-

    그나저나 ti를 한글로 치니 샤가 되는군요,
    /ti/는 무슨 뜻인지 물어도 되나요? 된다면 내친 김에 답까지 해 주세요 하하

  2. /ti/ says:

    실제로는 아무 말도 못 했다니까요. 누가 저 가상의 대답을 영어로 좀 써 주면 좋겠네.

    //는 음운론에서 쓰는 기호입니다. 기저형으로 /ti/를 줄 테니 표면형은 말하는 사람이 결정하세요, 라는 것이지요. ti는 frozenfiremeidi의 마지막 음절이고요. di가 아니라 ti인 이유는 meidi가 한어 병음이고, 한어 병음 표기 d의 발음이 무성음 /t/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어 `디’로 읽으면 무난합니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읽어도 좋습니다. 사실 [+coronal, -sonorant]이기만 하면, 그러니까 혀 앞부분을 쓰는 장애음이기만 하면 어떤 자음을 써도 괜찮습니다. 대신 모음 i는 살려 주세요.

    어쨌든 가능한 표면형을 나열해 보면 오프라인에서 불리는 다른 두 이름과도 억지로나마 공통점을 끌어댈 수 있어서 두루뭉술하게 기저형 하나만 제시했습니다. meidi뿐만 아니라 ㅊ-나 ㅅ-에서 따 오기도 했다고 우길 수 있도록.

  3. passerby says:

    우연히 들어오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같은 학교에 다니시는 분이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아마 빈말처럼 남기신 것 같은데… 하고 싶었던 말을 누가 좀 영어로 써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읽고… 뭐 짧은 영어 실력이지만, 여기 들어와서 재미있는 글을 많이 읽은 데 대한 일종의 관람료 지불 같은 심정으로 적어봅니다.

    수업이나 연구에 방해를 주지 않고 편히 놀 만한 공터가 없어서입니다.
    They’re there because there’s nowhere else they could play the game without bothering anyone.
    만약 있다면, 학교에서 당장 그 자리에 건물을 세웠겠지요.
    If there were such a place, the school would have erected a new building.

    지난 몇 년 동안 이 학교에서 새로 생긴 건물 상당수가 그런 공터나 운동장을 밀어버리고 들어선 것이고요.
    Many of the new buildings constructed for the last couple years are taking place of such lots or playgrounds.

    학교는 기존 건물에 있던 학생 자치 공간도 줄이거나 없애지 못해서 안달이에요.
    The school is eager to either reduce or eliminate any existing places at the expense of the student body.

    이 수업 시간 동안 밖에서 노는 저 친구들 말고도 옆 복도에서 떠드는 친구들도 많지 않습니까?
    There are more students who are making noises in the hallway other than them playing the game outside.

    갈 만한 곳이 있다면 벌써 거기로 이동했을 텐데 갈 곳이 없으니까 그러는 겁니다.
    They are there because there’s nowhere else to go; they’d have gone there if there were any space.

    저 친구들에게 배려심이 좀 더 있으면 좋겠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동시에 저 친구들이 학교에 자기들을 위한 공간을 확보해 달라고 직접 요구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요.
    It’s true it’d be wonderful if they could be a litte more considerate; but at the same time, they COULD request the shcool to secure some space for students.

    선생님께서도 저 친구들이 모여서 노는 것 자체를 문제로 삼으시지는 않으셨잖아요.
    You also didn’t think it a problem that they gathered and had fun togehter.

    뭐 우리 말을 그대로 옮기다보니, 어색하기 짝이 없지만… 사이트에 들어와서 글을 읽다보니… 사실 다른 사람들이 “천재가 아니면 하기 힘든 학문” 혹은 “천재에게만 가능한 복수 전공 combination”이라는 말을 할만도 하다는 생각이 드는 글들이 많네요… 유쾌하고, 굉장히 똑똑해 보인다는 생각… 물론 a pinch of nerdity is indelible… ^^ 열심히 하시면, 곧 이 정도 영어는 쉽게 하실 수 있을 꺼에요… ^^

    • /ti/ says:

      우와아, 영어로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천재 이야기와 복수전공 이야기는 각기 별도의 포스트에 썼고, 서로 다른 이야기입니다. 언어학+수학 조합이 천재에게만 가능하다는 말은, 다행히도 못 들어보았습니다. ;-) 대신 오타쿠 취급을 받습니다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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